역대 최고의 흥행몰이에 성공하며 마무리된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orld Baseball Classic, 이하 WBC). 예상했던 대로, 대회 내내 세계 정상을 차지하기 위한 각국 슈퍼스타들의 수준 높고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특히 결승전 마지막에는 같은 소속팀인 오타니 쇼헤이(일본)와 마이크 트라웃(미국)의 만화 같은 명승부까지 나오며, 이번 WBC는 팬들이 갖고 있던 최고의 낭만을 실현했다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런 축제 속에서도 대한민국 대표팀은 웃지 못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1라운드 통과조차 실패했기 때문. 오히려 쓰린 입맛을 다시며 침울함 속에 개막을 준비해야 했다. (4월 7일 작성)
에디터 김민규 사진 스포츠코리아
#그날을 되짚어보며
이번 대회는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그동안의 부진을 털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참가국이 20개국으로 늘어나며 1라운드 통과를 위해서 경쟁해야 할 팀이 하나 늘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일본을 제외한 호주, 체코, 중국은 이길 확률이 상당히 높은 상대였다. 설령 일본에 지더라도 나머지 팀들만 이긴다면 그 어떤 변수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에, 2라운드 진출까지는 무난할 것으로 보였다. 다른 조에 비해 유독 대진운이 좋았던 탓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대회 흥행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우리 대표팀이 무난하게 8강에 올라갈 수 있도록 편성해준 게 아니냐는 추측이 돌았을 정도다.
하지만 2013년, 2017년 대회 모두 첫 경기에서 부진했던 징크스가 이어진 것일까. 대한민국 대표팀은 호주전에서 7대8, 1점 차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일본전을 제외하고 승리를 예상했던 세 경기 중 그나마 일격을 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경기였지만, 지난 두 대회에서의 네덜란드에 비하면 호주는 상당한 약체였다. 경기 전의 우려가 결코 현실이 돼서는 안 됐다.
물론 그 후로도 세 경기나 남아 있었지만, 첫 경기의 패배로 모든 시나리오가 어긋나버린 상황. 그리고 대표팀은 두 번째 경기였던 일본전마저도 4대13으로 완패하며 완전히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지만, 호주전 패배가 겹친 데다 일본과의 전력 차가 상상 이상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오죽하면 일본뿐 아니라 경기를 관전한 다른 국가들마저도 “우리가 알고 있던 대한민국이 맞나?”라고 반응했을까.
이 두 번의 패배로 사실상 탈락이 결정됐다. 대표팀은 체코와 중국과의 경기를 잡으며 체면치레를 했지만, 침울해진 분위기를 바꾸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결국 최소 8강 이상을 목표로 세운 이강철호는, 고작 네 경기로 대회를 마감하고 쓸쓸하게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책임의 소재
이번 대표팀의 부진이 워낙 파장이 컸던 만큼, 실패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가장 직접적으로 이강철 감독의 선수 운용에 관한 문제부터, 고교야구에서의 나무 혹은 알루미늄 배트 사용에 관한 문제, 그리고 토종 에이스가 육성되지 않는 한국 야구의 전반적인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까지, 많은 사람이 이번 ‘WBC 참사’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내놓았다. 또한 그들은 국가대표팀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개혁안을 제시하며, 정말 한국 야구가 이보다 더 추락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비판의 내용은 참으로 각양각색이라 모든 걸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확실한 것은 이들의 모든 주장이 그동안 한국 야구계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온 것들이며, 최근 KBO의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정확하게 꼬집었다는 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대회를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바로 한국 프로야구가 오랫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이다.
당장 이번 대회 결승전의 주인공이었던 일본과 미국을 생각해보자. 일본은 ‘사무라이 재팬’이라는 상징적인 이름 아래 계속해서 국가대표팀을 관리하고 개선하는 데에 힘써왔고, 이는 2019년 프리미어12, 2020 도쿄 올림픽, 2023 WBC 3연속 대회 우승이라는 결실로 나타났다. 또한 미국 역시 첫 우승을 일궈낸 2017년 이후로 주요 메이저리거들이 대표팀에 진심이 되기 시작했고, 이번 대회 역시 결선 토너먼트에서 난적 베네수엘라와 쿠바를 연달아 제압하며 2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하는 등 점차 국제대회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에 버금가는 최강팀을 구축한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공화국, 푸에르토리코 등 중남미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번 대회 깜짝 4강에 오른 멕시코와 쿠바, 그리고 한동안 야구의 불모지라고 여겨졌던 유럽의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같은 국가들의 선전 또한 화제를 모았다. 이에 더해 우리 대표팀을 꺾은 호주를 포함해 파나마와 체코 등 대규모의 프로 리그 없이도 국제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팀들이 명백하게 늘어났다. 말 그대로 ‘절대 약자’가 많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어땠나. 이미 WBC에서 2연속 1라운드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신 데다가 2019 프리미어12 일본전 2연패, 2020 도쿄 올림픽 노메달이라는 부진이 있었음에도 대표팀 경쟁력 향상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부족했다. 한때 선동열, 김경문 전 감독을 연이어 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선임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마저도 선 감독의 사퇴와 김 감독의 부진으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한국 대표팀은 실패를 복기하고 전력을 상승시킬 뚜렷한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부진이 이어질 때마다 늘 ‘정신력이 부족했다’라는 등의 피드백만이 이어졌을 뿐, 다음 대회를 위해 반전을 도모할 기회를 늘 놓치고 말았다.
#현실에 냉혹해질 것
인정해야 한다. 과거 베이징 올림픽, 1․2회 WBC 등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룩했지만, 그것은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은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우리가 늘 그때의 역사에 취해있는 사이, 그전까지 소극적이던 메이저리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한때 맞수라고 불린 일본은 메이저리그 올스타가 모인 미국을 제압할 정도로 발전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그들의 발전 속도에 발맞추지 못했고, 이제 야구 강국으로서의 면모는 흐릿해진 듯하다.
일례로, 21세기 세계 야구의 최대 트렌드 중 하나는 투수들의 구속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속도 혁명’이었다. 본격적으로 속도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2014년 이래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직구 평균 구속이 꾸준히 증가하여 2021년에 이르러서는 기어코 평균 150km/h를 넘었으며,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일본 역시 리그 전체의 직구 평균 구속이 146km/h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KBO 역시 최근에서야 구속 상승이 이뤄져 144km/h를 돌파하긴 했으나, 상위 2개 리그를 따라잡기에는 아직 멀다. 거기에 ‘빠른 공의 제구가 보장됐느냐’의 여부까지 생각하면, 그 차이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렇게 투수의 수준에서 차이가 발생하니 그들을 상대하는 타자들의 역량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강력한 공을 던지는 투수가 많으면 자연스레 그 공을 대처하기 위한 타자들의 기술이 발전하게 되고, 결국 리그 전체의 수준 향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호주, 체코, 중국과의 경기와는 달리 대한민국 타자들이 일본전에서 고전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하나씩 차근차근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낙담 속에만 빠지지 않는 것이다. 실패가 계속돼 좌절한 것은 사실이지만, 피상적인 피드백들만 제기됐을 뿐 그것이 현실로 이어진 것은 별로 없다.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면, 그다음에는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일단 단순하게 우리의 눈을 넓힐 기회를 마련해야 하는데, 이에 일각에서 제안한 것이 ‘국가대표 정기전’이다. A매치가 일상적이고, 국가대표팀 소집이 잦은 축구와는 달리, 리그 경기가 주요 이벤트인 야구의 특성상 A매치를 치를 일이 잘 없다. 게다가 KBO가 그동안 대표팀 브랜드화 및 친선 A매치에 보수적이었던 탓에, 국제대회 이외의 별도의 교류전이 사실상 이뤄진 적이 없다. 반면 일본과 대만은 2012년부터 거의 매년 정기적인 국가대표팀 교류전을 치르고 있다. 이들처럼 주기적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경험을 쌓는다면, 다른 국가의 수준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팀 코리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기량을 발전시키는 데에 분명히 유의미한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타 리그의 육성 시스템에서 배울 게 있다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일례로 일본 프로야구의 투수 육성 방법이 있다. 일본 투수들은 KBO리그의 투수보다 신체 조건이 뛰어나지도 않고 오히려 불리한 편에 속하지만, 메이저리거 못지않은 강력한 공을 던진다. 또 주목할 만한 점은 그들의 비약적인 구속 향상이 대부분 프로 입단 이후에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일본 투수 간 역량 차이가 고교야구 인프라보다도 프로 구단의 육성에서 결정됐다는 의미다. 따라서 해외로의 코치 연수의 기회를 늘려서, 효율적으로 강속구 투수를 육성하는 방법을 수용해야 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속도 혁명에 더는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예시를 들었지만, 단순히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외에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씩 해결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새로운 시대를 향해
WBC에서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우리는 또다시 국제대회를 준비해야 한다. 당장 9월 말에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있으며, 시즌 종료 후에는 제2회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이 예정돼 있다. 두 대회가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6개월. 비록 WBC처럼 각국의 올스타가 총출동하는 대회는 아니지만, 젊은 선수들이 출전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미래의 국가대표로 성장할 자원을 판가름할 수 있는 자리다. 이 대회를 결코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다행히 최근 문동주, 김서현을 포함하여 구속 면에서 역대급으로 평가받는 어린 선수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20대 초반인 지금, 벌써 150km/h 중후반의 공을 던지고 있으며, 장차 국제용 투수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거기에 작년에 열린 WBSC U-18, U-23 야구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각각 4위, 준우승을 기록했다. 비록 두 대회 모두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에 패배했다는 점이 쓰라리지만, 젊은 선수들이 같은 나이대 선수들로 이뤄진 여러 강호와의 대결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이 선수들은 아직 미완의 대기지만, 향후 기량을 갈고닦는다면 대표팀을 이끌 수 있는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다.
지난 3월 호(143호) ‘더그아웃 먼슬리’에서,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며 앞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 언급한 바 있다. 초기의 의도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정말로 대한민국 대표팀은 지난 영광의 시대와 완전한 종말을 고했다. 대회 직후에 베이징 올림픽과 2회 WBC에서의 영광을 이끈 마지막 세대인 김현수와 김광현이 먼저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고, 뒤이어 8년 가까이 대표팀 마스크를 썼던 양의지마저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었다. 이제는 옛날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 시작이 썩 좋지는 않았기에, 배턴을 이어받은 세대의 어깨가 적잖이 무겁다.
이번 WBC에서의 실패는 분명 뼈아팠다. 하지만 현재 실패에 안주하고 좌절만 한다면, 앞으로의 모습 또한 2023 WBC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새 시대는 시작됐다. 쓰린 역사를 계속 이어갈지, 혹은 이전의 역사를 끊어내고 새로운 영광의 시대를 열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