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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아카이브
어떤 선수의 생애 첫 만루 홈런 혹은 어떤 팀의 첫 우승 혹은 KBO리그 역사에 새겨진 대기록 뒤에는 항상 함께하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비록 그 말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진 않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 의해 꾸준히 재생된다. 누군가에겐 스쳐 지나가는 순간일지라도 당사자나 팬들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에 생생한 현장감을 불어 넣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캐스터의 말은 멋진 플레이를 빛내주는 선물과도 같다.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듯 좀 더 집중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선수의 새로운 면모를 엿볼 수도 있고, 차마 내가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을 대신 멋지게 외쳐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하나의 멋진 아카이브가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Photographer Mino Hwang Editor Nahyeon Kim Location Dugout Magazine Studio
#오프 더 카메라
<더그아웃 매거진> 독자분들께 인사 부탁해요. (11월 15일 인터뷰)
안녕하세요. 평소 <더그아웃 매거진>을 즐겨보는 애독자였는데 인터뷰하게 돼서 영광이고 반갑습니다. 스포티비 캐스터 김민수입니다.
포스트 시즌이 한창 진행 중이에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포스트 시즌은 SPOTV가 생중계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현장에 가는 일은 없어요. 그래도 라이브로 똑같이 해설위원이랑 진행해서 녹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지상파 3사가 모두 플레이오프 2차전 방송을 포기하는 바람에 순서가 돌아와서요. 지난주 잠실야구장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정규 시즌에 캐스터의 하루 일정이 궁금해요.
최소 플레이 볼 3시간 전엔 현장에 도착해야 해요. 수도권이든 지방이든요. 3연전이 시작되는 전날에는 밤새워서 준비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올해부턴 메이저리그도 맡았거든요. 메이저리그는 새벽에 하니까, 자정에서 새벽 1시쯤 일을 시작해서 저녁에는 KBO리그 중계를 하러 현장에 가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굉장히 바쁜 한 해였을 것 같아요.)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해내고 싶었어요. 다행히 회사에서 제가 수도권 위주로 배치될 수 있도록 배려해줬습니다.
올해 SSG 랜더스 최정의 400홈런이나 KT 위즈 정규 시즌 우승 등 인상적인 경기에서 팬들의 심금을 울리는 문장으로 화제가 됐어요. 심정이 어땠나요?
대기록이 나올 것 같은 날이면 때론 부담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캐스터의 특권 아닐까요? 역사적 현장에 제 목소리가 담기는 거니까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려고 하죠. 미리 멘트를 준비할 때는 팬들의 마음은 어떨지 예상해보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최정 선수 같은 경우에는 대기록을 달성하기까지의 첫 번째 홈런부터 모든 홈런이 팬들에겐 어떤 의미일까 공감하려고 노력했어요. KT의 우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정규 시즌에서 1위를 정하지 못하고 타이브레이커까지 왔기 때문에 KT와 삼성 라이온즈 두 버전의 우승 멘트를 다 준비했거든요.
쓰지 못한 말들이 아깝진 않나요?
아까울 때가 있죠. 어떤 팬분은 제게 SNS 다이렉트 메시지로 만약 삼성이 우승했다면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물어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보다 훨씬 좋은 글을 준비해둔 선배님들이 많을 거고, 아쉽게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져서 공개하기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언젠가는 쓸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 묵혀두고 있습니다.
시그니처 멘트로 “1타점, 2타점”과 “계속 뜁니다, 아직도 뜁니다” 등이 있어요. 어떻게 탄생하게 된 건가요?
제가 SBS Sports의 ‘베이스볼 S’ 하이라이트 더빙으로 캐스터를 시작했거든요. 그때의 발칙한 생각으로는 언젠가는 중계를 하게 될 테니까 미리 연습을 철저히 해야겠다고 판단한 거죠. 그래서 하이라이트를 편집하는 PD님과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인상 깊게 말할 수 있을까 하고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우연히 나오게 된 거예요. 그리고 “계속 뜁니다”는 제 아이돌이자 롤모델인 SBS 정우영 선배의 말에서 떠올렸습니다. 라이브 연습을 하면서 많은 경기 영상을 봤거든요. 9회까지 진행되는 3, 4시간 동안 여러 선배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중 특히 정우영 선배의 방송이 멋있고, 닮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따라 해보고 써보기도 하면서 제 것을 만들어 냈어요.
팬들만 아는 선수들의 특징이나 별명 등을 잘 아는 거로 유명해요. 팬들 사이에서는 구단 유튜브나 커뮤니티를 참고하는 것 같다는 반응이 많은데요.
맞습니다. 제가 한 경기를 담당하고 있으면 나머지 게임은 볼 수 없잖아요. 제가 얻지 못한 새로운 정보와 그때의 분위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팬들이라고 생각했어요. 무조건 의지하는 건 아니지만 참고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구단 유튜브는 일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재밌게 보고 있어요. 요즘은 10개 구단 다 퀄리티도 좋고 흥미로운 콘텐츠가 많더라고요.
세이버메트릭스 같은 구체적인 기록도 정확하게 활용하고 있어요. 꾸준한 공부가 뒷받침돼야겠어요.
제가 세이버메트릭스를 좋아해요. 그게 야구의 매력이잖아요. 예를 들어 이 투수의 구종 가치가 어떻고, 득점권 피안타율은 어떤지 등을 얘기하는 게 결과를 예측해보는 하나의 재미기도 하고요. 책도 사 읽으면서 꾸준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송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수치를 말하는 건 마냥 쉽지만은 않습니다. 해설위원과도 호흡을 맞춰야 하고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또 몇 년의 경험이 쌓이다 보니 팬분들이 좋아하는 건 독창적이고 재밌는 말이란 걸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데이터와 멘트의 비율을 7:3 정도로 뒀다면 요즘은 뒤바뀐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데이터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고 있어요.
방송 전 SNS를 하면 중계가 잘 안 되는 징크스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극복했나요?
아뇨. (웃음)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는데 저는 라이브 시작 전 그날 선발 투수처럼 준비해요. 루틴이 있어요. 경기 시작 2시간 전에 레드불을 마셔야 하고, 그런데도 정신이 확 들지 않으면 30분 전 카페인을 한 번 더 섭취해요. 자료를 인쇄하는 시간, 라인업을 점검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요. 저도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싶은데 그렇게만 하면 마음처럼 잘 안 돼요. 그래서 계속 못 했어요. 얼마 전에 포스트 시즌이라는 큰 경기를 맡게 돼서 글을 올렸어요. 아니나 다를까 끝나고 나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결국 징크스도 마음의 문제잖아요.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면 SNS가 대수겠어요. 앞으로는 이 징크스를 깨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중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이었나요?
바로 떠오르는 날이 있어요. 무박 2일 경기. 2017시즌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가 만났을 때였죠. 사실 여기도 징크스가 있어요. 제가 컨디션이 안 좋으면 꼭 연장전까지 가거나 길어져요. 그날도 3연전의 첫날이었어요. 감기 기운이 있었거든요. 오늘은 좀 체력을 비축하고 숙소 가서 약 먹고 푹 자야지 했는데 12시를 넘어가더라고요. (웃음)
실수했던 경험도 있나요?
초창기에 몇 번 했던 실수가 있어요. 제가 그때는 이런 멘트를 자주 했거든요. “이 타구는 확인할 필요가 없다. 이미 담장 밖을 넘었다.” 아직도 기억나요. 이대호 선수였어요. 딱 쳤고, 타구가 빠르게 날아갔고, 투수도 고개를 숙였어요. 제가 자신 있게 “이 타구는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대호의 타구는!” 하는 데 공이 뚝 떨어져서 잡힌 거예요. 그래서 “타구는! 좌익수가 잡았습니다” 하고 급하게 마무리했죠. 그래서 요즘은 저 말을 잘 안 써요. 저는 만약 야구를 했다면 외야수는 절대 하면 안 됐을 거예요. 타구 판단이 안 되니까. 요즘은 또 수비 시프트를 많이 쓰잖아요. 한번은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가 타자가 공을 쳤는데 유격수 방향으로 날아가는 거예요. 바로 “유격수!”하고 외쳤는데 3루수가 잡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그래서 유격수! 자리에 있던 3루수가 잡았습니다”라며 급하게 덧붙이기도 해요.
재밌었던 에피소드도 있는지 궁금해요.
친한 사람들이랑 있으면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데 우리끼린 너무 웃길 때가 있잖아요. 특히 거기에 절대 웃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으면 참을 수가 없어져요. 중계석 옆에 기록원이 항상 있어요. 그때 기록원이 판다처럼 생긴 귀여운 분이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저희가 없던 사이에 과자를 먹고 있었나 봐요. 놀랐는지 사레들려서 기침하는 모습을 보고 약간 웃던 상태에서 방송이 시작됐어요. 그러자 기록원이 참고 있던 기침을 콜록대며 내뱉더니 얼굴이 시뻘게지는 거예요. 김재현 위원이 그걸 보고 빵 터져서 참느라고 같이 얼굴이 빨개지고 핏줄이 올라오더니 결국 ‘풉’ 하고 웃어버렸어요. 저도 같이 웃는 바람에 방송에 아무 소리도 안 나오고 아찔했죠. 근데 웃음을 참는 소리가 시청자분들께는 끙끙거리는 것처럼 들렸나 봐요. 김재현 위원 아프냐고 글 올라오고요.
언젠가 꼭 한번 중계해보고 싶은 기록이나 경기가 있나요?
아무도 해보지 못한 퍼펙트게임 중계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야구에 관심을 가질 때부터 투수를 좋아했고 에이스에 관한 환상이 있거든요. 그 현장에 목소리를 싣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그럴 땐 멘트를 미리 준비하진 못하겠네요.
맞아요. 그런데 각 잡고 준비할 때보다 오히려 더 좋은 내용이 퍼뜩 떠오르는 경우가 또 있어요. 2018시즌이었는데 롯데가 당시 개막 후 7연패를 했거든요. 그리고 만우절 날 드디어 첫 승리를 거뒀어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불현듯 만우절이라는 게 생각나서 “거짓말같이 이어진 개막 7연패, 4월의 첫날 거짓말 같은 역전으로 시즌 첫 승리”까지 말했어요. 그러다가 힘들었을 팬들의 마음이 떠올라서 “자이언츠의 시즌은 바로 오늘, 일곱 걸음 뒤에서 시작됩니다”라고 즉석에서 말했죠. 그럴 때는 저도 집에 가면서 ‘와, 이런 게 떠오르네’ 하며 뿌듯하더라고요.
#어바웃 더 민수컬리
인스타 아이디가 ‘min_scully’더라고요. 무슨 뜻인가요?
미국의 유명 스포츠 캐스터 ‘빈 스컬리’를 따서 만든 거예요. 감히 그렇게 되겠다는 의미까진 아니지만, 전설적인 아나운서이자 살아있는 역사와 같은 분이거든요. 예전에 한 동료가 저를 빈 스컬리에서 착안해서 ‘민수컬리’라고 불렀어요. 마음에 들더라고요. 스컬리는 중계를 몇십 년씩이나 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오른 사람이니까요. 저도 그렇게 오래 활약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아이디로 삼았습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대단한 분이 많잖아요. 예전에 유수호 선배, 임주완 선배 또 제가 어릴 때 정말 좋아했던 송인득 선배도 있고요. 그 아래로 내려오면 지금 열심히 뛰고 계시는 (한)명재 선배와 우영 선배까지 저도 그들의 뒤를 따라서 오래오래 시청자분들에게 야구를 전달하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부끄러운 닉네임입니다.
이야기한 대로 SBS Sports에서 ‘베이스볼 S’ 하이라이트 더빙으로 이 일을 시작했어요. 어떻게 데뷔하게 된 건지 궁금해요.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서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어요. 워낙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에 올림픽이나 월드컵 현장에 가는 스포츠 전문 아나운서가 되거나 스포츠를 업으로 삼는 캐스터가 되면 어떨까 하고 막연히 꿈꿨어요. 마침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야구 인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여러 채널에서 ‘아이 러브 베이스볼’, ‘베이스볼 투나잇 야’, ‘베이스볼 S’ 등 KBO리그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면서 인력이 필요해진 거죠. 마침 SBS Sports에서 젊은 캐스터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 지원해서 합격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하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KBO리그의 역사적인 순간에 제 목소리를 남길 수 있잖아요. 그럴 때 뿌듯하죠. 또 시청자분들이 제 중계를 좋아해 주실 때 정말 뿌듯해요. 사실 야구팬들이 인터넷에 글을 쓸 때 칭찬하기 위한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비판하려고 쓸 때가 많죠. 그런데 나와 일면식도 없는 분이 굳이 시간을 내서 좋은 글을 써주신다는 게 감사해요. 그런 글들은 제가 힘이 들고 지칠 때마다 치료해주는 명약 같아요.
무난하게 이어지는 게임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샤우팅을 많이 하게 되는 게임 중 무엇을 더 선호하나요?
아마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무조건 점수가 많이 나오고 빡빡한 경기를 선호할 겁니다. 지켜보는 분들과 마찬가지로 쫄깃쫄깃한 긴장감이 느껴져야 저희도 몰입하거든요. 점수 차가 크게 나고 무난히 이어지는 게임은 어떻게 하면 시청자분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게 해 우리 채널에 붙잡아둘 수 있을지 고민하게 돼요.
이외에 도전해보고 싶은 종목이 있다면요?
저는 남자 캐스터치고는 정적인 목소리에 가깝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종목 중에 뭐가 있을까 하다가 얼마 전에 피겨스케이팅을 봤어요. 동작이나 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스포츠와는 확연히 다르잖아요.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또 제가 볼링을 좋아해서 그것도 재밌겠더라고요. 사실 야구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잖아요. 이왕이면 시간이 정해져 있는 종목이 좋지 않나…. (웃음)
#라이브 인 베이스볼
본인이 바라본 2021시즌을 한마디로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다사다난한 해였죠. 현장에서 느낀 걸 표현하자면, 사실 위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아나운서를 준비할 때만 해도 스포츠 캐스터를 꿈꾼다면 10명 중 9명이 야구를 원했는데, 지금은 10명 중 2, 3명밖에 안 돼요. 대부분 해외 축구가 인기죠. 학생들 사이에서도 야구 얘기는 마니아들끼리만 나눌 뿐,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가 어려워요.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방역 수칙 위반 사건이 있었고, 리그가 중단됐고,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아쉬운 결과를 냈잖아요. 이번만큼은 엄살로 말하는 위기가 아니에요. 그래도 내적으로는 좋은 일들도 많았어요. 신생팀이던 KT가 창단 첫 정규 시즌 우승을 거머쥐었고, 암흑기를 거친 삼성이 다시 가을을 맞이한 스토리가 쓰였죠. 어떻게 하면 팬들의 마음속에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야구 캐스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제가 그런 위치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야구를 정말 사랑하고 일상에 두지 않으면 힘든 직업입니다. 일하다 보면 자주 가게 되는 팀과 자주 못 가는 팀이 생겨요. 그런데 야구는 월요일 빼고 매일 하잖아요. 조금만 관심에서 벗어나면 그사이에 너무나 많은 게 바뀌어있어요. 금, 토, 일 3연전이 예정돼 있어 월요일에 미리 준비해버리면 쓸 수 없게 돼요. 화, 수, 목 사이에 타격감이 올랐던 타자는 다시 떨어져 있고, 새 얼굴이 등장할 때가 있으니까요.
정말 하루도 눈을 뗄 수 없겠네요.
그렇죠. 일이 아니라 일상이 돼 항상 가까이 둬야 합니다. 또 많은 분이 물어보는 게 있어요. 남들은 돈 주고 보러 가는데 일하면서 보면 좋은 게 아니냐. 맞아요. 제 일이 싫었던 적은 없어요. 그런데 팬과 캐스터가 보는 경기는 사뭇 다릅니다. 제겐 직장이자 일터고, 평가받는 자리에 있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거나 방송사가 요구하는 게 있어도 결국 팬들의 반응과 요구를 따라 흘러가게 돼요. 제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다양하게 시도한 것들이 처음엔 방송사에서 환영받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팬들이 좋아해 주시니까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시청자들의 선호나 요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고, 변화를 헤아릴 수 있는 판단력도 필요해요. 이런 관점에서 야구를 진심으로 사랑하진 않는 사람이 무난하게는 할 수 있더라도, 잘할 순 없을 거예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이 궁금해요.
당연한 거지만 중계를 더 잘하고 싶어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캐스터도 여러 가지 능력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샤우팅을 시원하게 하는 거로 생각합니다. 투수로 치면 샤우팅이 패스트볼과 마찬가진 거죠. 그런데 저는 빠른 공을 갖고 있진 않거든요. 그래서 제구를 더 정교하게 다듬고 많은 변화구를 장착하고 나왔어요. 하지만 역시 패스트볼을 놓을 순 없잖아요. 더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도 아주 위력적인 변화구를 갖춘 만큼 큰 사랑을 받는 게 아닐까 해요.
그렇다면 참 다행이네요. 하지만 제가 열심히 준비한 멘트가 가끔 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정답은 없겠지만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 ‘이 사람이 중계하니까 좋다’, ‘김민수가 맡는 경기를 보고 싶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죠. 사실 제가 일부러 더 화려하게 말하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2019년 강백호의 첫 만루홈런 중계를 했는데, 슬램덩크 문구를 인용해서 “강백호,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말했어요. 한참 후에 강백호 선수가 문신으로 새기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고 전한 적이 있었죠. 그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가 갑자기 활약해서 첫 인터뷰를 할 때,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그와 가족들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잖아요. 그때마다 제가 어떻게 꾸미고 포장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만큼 항상 책임감을 유지하며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선수와 팬, 가족들께 예쁘게 포장해서 드리고 싶은 마음이죠.
정말 인상적인 말이네요. 김민수 캐스터에게 야구란?
야구가 꽃과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우리 일상에 항상 존재하지만 잘 꾸며서 선물하면 특별한 의미가 되기도 하잖아요. 시 구절처럼 이름을 불러줬을 때 의미가 생기듯이 팬들이 불러주고 응원해줘야 공놀이에서 스포츠가 되는 거죠. 저도 열심히 다듬고 꾸미고 포장해서 팬들에게 아름다운 꽃다발을 드리는 캐스터가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과 시청자분들께 한마디 해주세요.
제 목소리는 익숙하겠지만, 얼굴은 낯설 것 같아요.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한번 봐주시면 좋겠고, 제 중계를 사랑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야구에서 나오는 플레이나 장면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참 많아요. 야구를 즐기면서 인생도 배우고 행복한 일상들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다시 사람으로 치유한다는 말이 있다. 야구에 실망하고 상처를 받은 팬들이 많은 지금, 김민수 캐스터의 야구 이야기가 치료제가 됐으면 한다. 이외에도 미처 다 담지 못한 말들이 녹음기 속에 묵혀 있다. 무엇보다 2022시즌을 예측해달라는 질문에 10개 구단을 빼놓지 않고 하나하나 긍정적인 요소를 짚어준 답변을 쓰지 못한 게 아쉽다. 정성껏 준비했으나 결국 뱉지 못한 멘트를 대하는 그의 기분이 이럴까. 김민수 캐스터의 마음처럼 팬들에게도 야구가 고통이 아니라 선물로 다가가길 바란다.
▲ 더그아웃 매거진 128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1년 128호(12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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