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팀이 없습니다.팀에 소속해 활동해보세요!
가입된 리그가 없습니다.리그에 가입해보세요!
서포트하는 선수가 없습니다.선수들을 서포트 해보세요!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유명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은퇴 연설에서 읊은 군가의 한 구절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활동하던 무대에서 물러날 시기가 오기 마련이고, 그의 빈자리는 새로운 인물로 메워진다. 물러난 이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고 유·무형의 흔적을 남겨 그를 떠나보낸 이들이 기억하게 만든다. 스포츠에선 노병을 일컬어 베테랑이라고도 부른다. 이번 ‘더그아웃 먼슬리’는 오랜 시간 우리에게 야구의 재미와 감동을 주고 2021시즌을 끝으로 떠나는 베테랑들의 이야기이자, 그들을 향한 송별사다. (12월 4일 작성)
에디터 박소정 사진 KT 위즈, SSG 랜더스, 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
#그대들이 걸어온 길
그라운드를 밟게 된 계기는 다양하다. 어떤 이는 텔레비전 또는 경기장에서 본 경기가 재밌어서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또 다른 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갑자기 다가온 야구부 감독의 자질이 보인다는 말에 얼떨결에 입단 테스트를 받고 선수가 됐다. 출발에 앞서 부모님들은 하고 싶은 걸 하라며 찬성해주기도, 힘든 걸 왜 하려고 하냐며 반대하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야구 인생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이들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돼줬다.
훈련은 쉽지 않았다. 영상 속 롤 모델의 멋진 활약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수백 번, 아니 수만 번 배트를 휘두르고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공을 던졌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감독과 코치들은 아직 멀었다며 끝없는 펑고를 이어나갔다. 슬라이딩하며 마시는 경기장의 흙먼지. 엑스레이를 찍으면 그동안 마신 흙먼지 때문에 내 속도 뿌옇게 보이는 거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의 유니폼은 사실 흰색이 아니고 흙색이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또래 친구들이 학창 시절의 추억을 쌓는 걸 보면 부러웠다. ‘사서 고생이다’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었다. 왜?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결코 그런 이유로 야구와 함께한 시간을 흐지부지 넘기고 싶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의 여드름처럼 야구와 헤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동안 지지해준 가족, 친구, 은사들에게 프로 무대에 당당히 선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신인드래프트에서 이름이 호명된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꿈에 부풀어 발 디딘 프로 무대는 전쟁터였다. 아마추어 시절 나름 많은 기대를 받았는데 프로에는 더 잘하는 이가 수두룩했다. 선배들은 뛰어넘을 수 없는 큰 성벽 같았고 성벽의 작은 틈새라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동기들과 함께 고군분투했다. 매년 새롭게 등장한 체격 좋은 신인들은 언제라도 빈자리를 치고 들어오려는 하이에나로 보였다. 2군에 가거나 재활 치료를 받을 땐 끝없이 뒤처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선배들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동기들의 전우, 후배들에겐 좋은 길잡이가 되고자 했다. 우린 한 팀이니까.
프로 생활 동안 잊지 못할 순간이 많다. 데뷔 첫 기록을 달성했을 때, 팀의 연패를 끊었을 때,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을 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많은 이들과 환호했다. 나태해질 때마다 정신을 잡아주던 코치진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쫓아오던 후배들, 매서운 비판과 따뜻한 응원을 번갈아 보내주던 팬들, 한결같이 아군이 돼준 가족과 지인들. 이 모든 걸 뒤로하고 이젠 정든 유니폼을 벗는다. 10여 년, 거의 2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삶의 대부분이었던 그라운드여, 안녕.
#베테랑의 존재
2021시즌 통합우승으로 선수 생활의 피날레를 장식한 KT 위즈 베테랑 유한준에게 축하를 전한다. 유한준은 맏형으로서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2021시즌 104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9 87안타 5홈런 42타점을 기록하며 최고령 야수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극적인 순간엔 몸을 사리지 않는 전력 질주로 후배들의 우승에 대한 열망도 끌어냈다. 오랜 현역 시절 동안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기 위해 바람직한 루틴을 지키고 사생활 관리도 철저했던 점에서 많은 이에게 ‘결점을 찾을 수 없는 이상적인 선수’라 불렸다.
총 7,951일 동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LG 트윈스 베테랑 이성우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2000년 육성선수로 입단한 그는 2번의 방출, 2번의 트레이드를 겪으며 평탄하지 않은 프로 생활을 보냈다. 본인 스스로는 화려하지 않은 야구 인생이었다고 하지만, 필요할 때 동료들의 빈자리를 채운 필수 자원으로서의 그의 행보를 잊을 수 없다. 간절함 속에서 얻은 출전 기회의 소중함을 아는 자세는 후배들에게도 좋은 귀감으로 남는다.
전천후 야수 요원이자 우월한 주루 실력을 갖춘 LG 베테랑 김용의의 근성을 인정한다. 14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유격수를 제외한 야수 전체 포지션을 소화하며 LG의 소금 같은 존재가 됐다. 주루 능력도 탁월해 그가 누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득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준수한 체력을 유지해 상시 출전 가능한 모습을 보였다. 모든 건 그의 근성에서 나온 꾸준한 자기관리와 훈련 습관 때문이었다.
원클럽맨이자 선발, 중간, 마무리를 오가며 마운드를 지킨 키움 히어로즈 베테랑 오주원의 헌신은 감명 깊다. 신인상 출신인 그는 불펜 투수로서 극적인 순간에 상대 타선을 꽁꽁 묶었다. 2012년 팔꿈치 수술로 주춤했던 그는 2019년 재기에 성공해 히어로즈를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는 데 일조했다. 현대 유니콘스와 히어로즈 역사의 산증인인 그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는 제2의 인생을 살고자 마운드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내려왔다.
5시즌 동안 KBO리그에 몸담은 SSG 랜더스 베테랑이자 최고의 외국인 선수 제이미 로맥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는 파워히터로서 잠실야구장에서 장외홈런을 두 번이나 치는 등 매년 강력한 타격을 보여줬다. 2021시즌엔 SSG 강타선 라인인 ‘최신맥주’의 한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수비 때는 순발력도 출중한 야수였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올스타전에선 맥아더 장군 코스프레를 하며 KBO리그에 녹아드는 등 국내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본인의 친정팀으로 돌아온 SSG 베테랑 정상호의 인생 제2막을 응원한다. 그는 KBO리그 데뷔 후 이적 전까지 15년 동안 랜더스의 전신인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한 포수다. 선배 박경완의 공백을 메꾼 2009시즌엔 데뷔 첫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고, 2011년엔 도루 저지율 1위에 오르는 등 맹활약했다. 한창 커리어를 꽃피울 시점에 반복된 잔부상에 발목을 잡혔지만 오랜 기간 쌓은 그의 노하우로 앞으로 후배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길 바란다.
NC 다이노스의 창단 멤버이자 역사 자체인 베테랑 모창민이 지도자로서도 승승장구하길 기원한다. 그는 팀 창단 첫 안타와 마산야구장의 마지막, 창원NC파크의 첫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며 다이노스 역사 곳곳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정교함과 적극성을 두루 갖춰 공격적인 타격을 보여준 그는 중요한 순간 한 방을 때려낼 줄 아는 타자였다. 야구에 대한 태도와 성실함도 모범적이라 지도자로서 성공적으로 후배양성을 해낼 거란 믿음이 간다.
롯데 자이언츠 베테랑 이병규의 눈야구는 팬들이 자연스레 그의 타석에 집중하게 하는 트레이드마크였다. 통산 4할에 가까운 출루율을 기록한 그는 ‘자신만의 존’ 설정의 대표주자였다. 신고선수 출신이지만 특기를 살린 꾸준한 노력으로 팀 간판타자로 성장한 대표적인 노력형 인재. 타격 재능을 인정받아 은퇴 직후 일찍이 지도자로 낙점된 그는 후배들에게 새로운 빛이 돼줄 것을 다짐했다.
2010년대 중반 국가대표팀의 외야를 책임진 롯데 베테랑 민병헌과의 재회를 기다린다. 1987년생으로 소개한 다른 이들보단 현역 기간이 짧지만, KBO리그와 더불어 4번의 국제대회 출전 경력을 합하면 베테랑이란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타석에선 공격적인 승부사이자 더그아웃에선 후배들에게 야구의 매력을 일깨워주던 선배였다. 비록 지병으로 안타깝게 일찍 은퇴하게 됐지만 건강한 모습의 그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이가 많다.
롯데 베테랑 송승준의 팀과 팬들을 향한 열정을 영원히 기억하자. 자이언츠의 최다 탈삼진과 선발승 기록을 가진 그는 마운드는 물론이고 더그아웃에서도 최고참으로서 후배들의 승리욕을 끌어냈다. 선발 투수의 중요한 덕목인 꾸준함을 갖춘 그는 전성기 시절 매년 100이닝 중반대 출전을 기록하며 활약했고, 고참급에 접어들며 후배 투수들에게 꾸준히 투구 비법을 전수했다. 2009시즌엔 3연속 완봉승이라는 경이로운 기록도 달성했다.
매 경기 빛나는 수비를 보여준 유틸리티 플레이어 KIA 타이거즈 베테랑 나주환이 키워낼 유망주들이 기대된다. 왕조 시절 SK의 주전 유격수를 맡은 그는 강한 어깨와 타구 판단력, 유연한 글러브질과 빠른 발을 갖춘 우수한 수비자원이었다. KIA로 이적 후에도 여전한 호수비를 보여줌과 동시에 준수한 타격성적을 기록했고, 베테랑으로서 ‘원 팀’ 정신을 강조한 덕분에 타이거즈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고조됐단 후배들의 증언도 있다.
한화 이글스 베테랑 이성열의 힘은 정말 놀라웠다. 정타로 맞기만 하면 담장을 넘어가 현역 시절 힘으로 그를 이길 자가 없었다. 2021시즌 은퇴 전 마지막 타석에선 만루포를 치며 거포 이성열답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해결사로서 극적인 홈런포를 날려주던 그의 모습을 더는 볼 순 없지만 새로운 거포 후계자들이 나올 때마다 그가 생각날 거다. 가능하다면 후배들에게 타격 노하우를 직접 가르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멀리 가진 마시게
매년 유니폼을 벗는 베테랑들의 이름을 볼 때마다 그들의 오랜 헌신이 담긴 KBO리그와 각 구단의 빛나는 순간들이 떠오른다.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팬들에게 희로애락이 담긴 추억을 만들어줬다. 이제 그들은 흙내 나는 정든 유니폼을 벗고 또 다른 출발점에 섰다. 지도자나 해설가로 경기장에 돌아오거나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둥지를 트는 이들도 있을 거다. 어디에 있든 긴 현역 시절 동안 팬들에게 안겨준 기쁨과 감동, 역사적인 순간들을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하길. 또한, 야구계와 후배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응원과 조언의 목소리를 아낌없이 내주길. 그라운드를 떠나더라도 너무 멀리 가진 말고 가까이 있길 바란다. 지금껏 청춘을 바쳐 우리와 함께해줬음에 감사한다.
▲ 더그아웃 매거진 129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2년 129호(1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 www.dugoutm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