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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시즌이 끝나고 오랜만에 야구 뉴스를 접한 사람이라면 거대한 혼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각 구단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많은 사랑을 받던 선수들이 대거 팀을 옮겼다. 이제는 ‘그 팀’ 하면 생각나는 ‘그 선수’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매해 이런 일들은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유독 팬들의 눈물 자국이 짙다. 충격적인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팀을 옮기는 과정에서 생겨난 불협화음이 선수와 팬의 마음에 생채기를 입혀서일까. 이제는 원클럽맨의 낭만이 사라지고 돈이 우선시되는 세상이 왔다고 한다. 머리로는 당연히 이해한다. 그들은 프로니까. 하지만 가슴에 남아있던 팬들의 사랑과 낭만의 불꽃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는 건 분명하다. (1월 4일 작성)
에디터 김나현 사진 KIA 타이거즈
#익숙한 이름, 낯선 유니폼
야구팬이라면 오랫동안 한 팀에서 뛰었던 프랜차이즈를 떠나보내는 아픔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거다. 이제는 그를 우리 팀에서 볼 수 없다는 현실은 전력 약화 그 이상의 슬픔이다. 이적한 뒤 친정 팀과의 첫 맞대결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 모자를 벗고 좌석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눈물 없인 볼 수 없다. 그런데 2022시즌엔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보게 될 예정이다. FA(자유계약선수)로 무려 5명의 프랜차이즈가 팀을 떠났기 때문이다.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주인공은 삼성 라이온즈의 박해민이었다. 2012년 신고선수로 입단했지만, 야구에 대한 간절함과 엄청난 노력으로 끝내 주장의 역할까지 올랐다. 2021시즌에는 시즌 아웃이 거론될 정도의 큰 부상에도 팀과 함께하겠단 일념으로 빠르게 복귀했고, 삼성 팬들은 10년여간 변치 않는 그의 간절함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12월 14일 LG 트윈스로 이적하면서 정든 푸른 유니폼을 벗게 됐다.
이후 2시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두산 베어스 박건우의 이적 발표였다. 지난해 90년생 동갑내기 절친들인 정수빈과 허경민이 FA 계약으로 잔류하면서 그 역시 팀에 남을 거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결국 NC 다이노스행이 확정된 것이다. 박건우는 두산에서 세 번의 우승을 함께 했을 뿐 아니라 동료들과의 찰떡 케미로 크나큰 사랑을 받은 간판타자였다.
사실 박건우를 향한 NC의 적극적인 구애는 나성범으로부터 시작됐다. 나성범은 다이노스의 창단 멤버로서 팀의 첫 우승을 일궈내기까지 중심축이 됐으며, 차기 영구결번 후보로도 거론됐다. 게다가 매년 이적시장에서 팬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았던 NC인 만큼 나성범의 잔류는 확실시되는 듯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NC가 박건우를 영입한 이유가 나성범의 이적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끝내 24일 KIA 타이거즈 합류 소식이 전해졌다.
눈물의 스토브리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롯데 자이언츠 하면 곧바로 떠올랐던 근성의 아이콘 손아섭도 팀을 떠나게 된 것이다. 손아섭은 자이언츠의 원클럽맨일 뿐만 아니라 연고지인 부산에서 평생 야구를 해왔던 로컬 보이로, 롯데의 심장 또는 자존심으로 불렸다. 게다가 이적팀이 경상도 지역 라이벌인 NC라는 점은 팬심을 더욱더 쓰라리게 했다.
가장 충격적인 소식은 키움 히어로즈에서 들려왔다. 키움은 이미 지난 시즌 팀을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였던 서건창을 트레이드하며 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상태였다. 10개 구단 중 유일하게 모기업이 없어 여러 스폰서를 전전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매해 특출난 신인을 발굴해내고 끈끈한 팀워크를 과시하며 강팀의 면모를 선보였던 히어로즈. 서건창과 박병호는 그들의 팀컬러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움 측에서 박병호와의 계약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틈을 타 KT 위즈가 손을 내밀었고, 끝내 충격적인 이적이 확정된 것이다.
이런 놀라운 소식들이 연이어 이어지며 그 어느 때보다 뒤숭숭한 스토브리그가 진행됐다. 떠나는 이들은 손편지로 감사함과 미안함을 전했고, 손아섭은 신문 지면 광고에 진심 어린 메시지를 싣기도 했다. 이에 서포터들은 트럭 시위를 통해 상실감과 분노를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매년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두산 팬들은 “두산은 추억할 수 있는 과거들이 있지만 추억을 만들어준 선수들은 추억할 수 없다”라는 문장을, 박병호라는 팀의 상징을 잃은 키움 팬들은 “팬들만 히어로즈의 심장 박병호를 기억하는가?”라는 문구를 내걸어 슬퍼했다.
#야구는 낭만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쉬움과는 별개로 떠나간 이와 붙잡지 못한 구단에 섣불리 돌을 던질 순 없다. FA는 시장에 나와 자유롭게 본인의 능력과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는 자격이지 않은가. 소신에 따라 팀을 옮긴 이들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 과열되는 시장 분위기에 따라 지나치게 몸값이 높아졌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어쨌든 각 구단이 필요한 전력을 수혈하기 위해 거액을 투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 이 역시 안 좋게 볼 수 없다.
하지만 스포츠는 엄연히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팀 스포츠인 야구에서 선수는 개인 플레이어일 뿐이니 과하게 반응할 필요 없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팬의 관계를 무정하게 잘라낼 순 없다. 모든 인간관계를 냉정하게 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많은 팬은 야구와 함께 자랐다. 타임아웃이 없는 게임, 순식간에 뒤집히는 점수, 거의 매일 진행되는 KBO리그의 특성상 야구는 우리의 매일매일과 맞닿아왔다. 괜히 “야구는 인생이다”라고 말하는 게 아닐 터. 이 명언이 와닿는 이들에게 수많은 추억을 쌓아 올린 선수와의 이별은 현실의 인간관계에서 겪는 것만큼이나 아플 수밖에 없다.
1982년 KBO리그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젊은이에게는 낭만을, 국민에게는 여가선용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출범했다. 물론 지금과는 사뭇 다른 직관 분위기에 각종 사건 사고도 있었지만 분명 그 문장 그대로 낭만은 있었다. 영원한 라이벌로 기록될 선동열과 최동원의 눈부신 대결은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울렸다. 국민타자 이승엽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등장하며 매년 수많은 관중이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느꼈고, IMF라는 어려운 시절 최초의 코리안 메이저리거 박찬호의 활약에 전 국민이 희망을 얻기도 했다. 어려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도 대중 스포츠로 자리매김한 야구는 낭만의 상징이었다.
앞서 말한 스타플레이어의 탄생은 야구의 주된 인기 요인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프랜차이즈 스타는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들의 팀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팬들의 각별함 또한 커진다. 어리바리하던 신인에서부터 점차 든든한 기둥으로 성장해가는 과정, 짜릿한 승리의 순간 함께 포효했던 얼굴, 팀이 침체한 상황에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던 모습은 응원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 하나씩 자리 잡는다. 처음으로 유니폼을 구매할 때 주저 없이 등번호를 마킹할 수 있는 선수, ‘우리 팀에는 OOO 있다’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프랜차이즈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LG의 심장이라 불리는 박용택은 소속팀과 팬들을 향한 깊은 애정을 선보여 감동을 안긴 인물로 꼽힌다. 첫 번째 FA를 신청하면서부터 잔류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드러냈고, 타율, 출루율, 안타, 타점, 득점, 등록일수까지 총 6가지의 옵션이 달린 불리한 조건에도 선뜻 도장을 찍었다. 두 번째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팀에서 총액 70억 원 수준의 거액을 제시해왔다고 알려졌지만, 그는 총액 50억 원 규모의 원소속팀 제안을 택하며 20억 원을 포기한 낭만의 대명사로 남았다.
SSG 랜더스(전 SK 와이번스)의 굳건한 중심 타자이자 차기 영구결번으로 거론되는 최정 역시 팀 사랑을 보여준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다. 2014년 첫 번째 FA 협상에서 소속팀 잔류를 택하며 “SK라는 팀 자체가 좋았다. 떠나기 싫었다”라는 팀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멘트를 남겼고, 이후 2018년 KBO리그에서 계약 기간 6년이라는 당시로선 상징적인 조건에 도장을 찍으며 사실상 원클럽맨이 확정됐다.
#불씨를 살리기 위해
그 당시 활활 타오르던 낭만의 불꽃은 빠르게 사그라들었지만, 희망적이게도 아직 불씨마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한화 이글스 최재훈은 5년 전에 한 약속을 지켰다. 2017년 4월 트레이드로 한화의 유니폼을 입은 그는 “10년 이상 이곳에서 팬들과 함께하겠다”라는 다짐을 남겼고, 2021시즌이 끝난 후 별다른 잡음 없이 잔류를 택하며 이번 스토브리그 1호 FA 계약을 맺었다. 걸출한 포수가 부족한 현 리그 상황에 따라 많은 오퍼가 있을 거로 보였지만 의리를 지켰다.
머지않아 이적 뉴스가 잇따라 터지며 팬심이 혼란한 와중 또 다른 훈훈한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시즌 부상으로 일찌감치 전열을 이탈한 SSG의 선발 투수 박종훈, 문승원이 KBO리그 최초의 비FA 다년 계약 소식을 알렸다. 리그 내 귀한 토종 선발 자원들인 만큼 FA 자격을 얻는 내년에 더 좋은 제안들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구단이 보인 믿음에 응한 것이다. 박종훈은 “다른 팀에 가면 이런 애정과 프라이드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란 감동적인 인터뷰로 성원에 보답했다. 이후 마찬가지로 1년만 지나면 시장에 나갈 수 있었던 한유섬 역시 소속팀과 비FA 5년 계약을 맺으며 SSG는 낭만 랜더스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여전히 야구에 감정을 이입하고, 상처받고 나서도 떠난 이의 앞날을 축복하며 내년 시즌을 기다리는 팬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KBO리그가 낭만의 시대라고 불리던 시절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예전과 비교하면 시장 상황 등 많은 게 바뀌었지만, 선수를 향한 팬의 일편단심은 변치 않았다. 아쉬운 작별을 고할지언정 그동안 받았던 응원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보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프로의 책임이 아닌가. 정든 팀을 떠나게 되더라도 그 뒷모습까지 아름답게 남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지키고 싶은 마지막 낭만이다.
▲ 더그아웃 매거진 130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2년 130호 (2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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