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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계십니까. 들리십니까. 당신이 뛰었던 꿈의 구장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당신과 함께했던 추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34년간 멋진 추억을 남겨준 대구 시민야구장, 고맙습니다.” 2015년 대구 구장에서 치러진 마지막 경기에서 한명재 캐스터가 남긴 말이다. 추억을 고이 안고 팬들과 한 걸음 멀어진 꿈의 구장들, 그리고 미래를 꿈꾸는 선수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시설들을 지방자치단체와 KBO는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에디터 김서현 사진 KIA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으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나가면 보이는 크고 감각적인 건물,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DDP’다. 2014년 3월 DDP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 자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경성 운동장이 완공되면서 탄생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긴 야구장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전까지 동대문 야구장은 한국 야구의 중심지였다. 전국고교야구 4대 대회인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부터 한국실업야구 대회와 대학야구, 그리고 실업 야구단, 군경 야구단, 대학 야구단이 모두 참여한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전 백호기)까지 거의 모든 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다. 또 마지막으로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가 시작된 공간이기도 하다.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가 서울종합운동장 잠실야구장을 사용하며 이곳은 아마야구 대회 위주로 사용됐다. 하지만 아마야구 특성상 수익이 나지 않는 탓에 서울시는 유지비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06년 디자인 플라자 건설을 공약으로 앞세운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부지로 동대문 야구장을 선택하며 2008년 3월 한국 야구의 역사적인 공간은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축구 전용 구장으로의 탈바꿈
인천 야구의 역사가 담겨있는 숭의 야구장은 원래 ‘도원 야구장’으로 불렸다. 지금의 인천 SSG 랜더스 필드(문학 야구장)가 생기기 전까지 인천 야구의 모든 역사가 담긴 곳으로, 1982년 KBO 원년 당시 삼미 슈퍼스타즈를 거쳐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와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가 사용했다. 2002년 개장한 문학 야구장으로 SK가 홈구장을 옮긴 뒤, 2004년 3월 14일에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를 끝으로 숭의 야구장에서는 프로야구 경기를 볼 수 없게 됐다.
그 이후로 숭의 야구장은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개최 구장이자 SK 2군 경기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인천광역시의 도시재생사업 추진 과정에서 재개발 대상이 된 숭의 야구장은 바로 옆 숭의 종합운동장과 함께 철거됐다. 지금은 이 부지를 숭의 아레나 파크라는 축구 전용 구장으로 만들어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비어버린 야구장은 복합문화공간 또는 다른 구기 종목의 경기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곧 오랜 시간 축적해온 한국 야구의 역사의 일부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925년 완공된 동대문 야구장, 1934년 완공된 숭의 야구장은 한국 야구 1세대의 향수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철거 당시에도 야구계의 반발이 있었으나 그렇다 할 성과 없이 유야무야 지나간 점은 안타깝다.
#2010년대 주인을 잃은 구장들
1948년 개장한 대구 시민 야구장은 KBO 원년부터 2015년까지 경기가 펼쳐진, 삼성의 왕조 시절을 품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낙후된 시설이 가장 큰 문제였다. 2010년 한국시리즈 당시 SK의 우승 직후 내야 라이트가 꺼지거나, 2011년 4월 16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갑작스레 정전으로 경기가 일시 정지되는 등 사상 초유의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허구연 현 KBO 총재를 비롯한 야구인들의 비판도 매번 이어졌다. 결국, 삼성은 2016년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로 둥지를 옮기며 드디어 메이저리그식 최신 구장의 쾌적함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후 시민 운동장 주 경기장을 축구 전용 경기장으로 만들고, 빈 야구장을 공원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하지만 숭의 야구장을 잃은 사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야구계의 반발이 컸다. 대구시는 2017년 리모델링을 통해 시민 야구장을 사회인 야구 및 지역 유소년 야구 경기장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리모델링을 통해 담장을 철거하고 외야 관중석 자리는 잔디 산책로로 꾸며 시민들도 함께 이용할 수 있게끔 했다.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는 1965년 개장한 광주 무등 야구장에서 원년부터 2013년까지 총 10번의 우승을 이뤘다. 무등 야구장은 리그 최다 우승의 역사를 담은 곳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선수들을 부상에서 지킬 수는 없는 낙후된 인조 잔디 구장이었다. 2012년 천연잔디로 교체하는 시공을 했으나 배수가 잘되지 않는 흙, 유난히 심한 내야 땅볼 타구 불규칙 바운드 등으로 여전히 선수들을 힘들게 했다. 2014년 KIA는 드디어 챔피언스 필드로 이사를 했고, 2017년 광주시는 무등 경기장 활용법으로 대구 시민 야구장의 사례를 참고하기로 했다. 우선 내, 외야 관중석을 모두 없애고 중앙 지정석과 기록석, 사무실만 남기기로 했다. 또한, 관중석 규모는 2,700석 정도로 줄이고, 그라운드 지하에 800여 면, 지상에 대형 27면의 주차장을 건립하며, 지상에는 야구장과 함께 시민을 위한 개방형 체육공원을 건립하고자 했다.
광주시는 야구장의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그라운드를 다시 인조 잔디로 교체하고 바로 옆 아파트 단지의 빛 공해 문제를 고려해 조명탑은 철거하며 녹지공간에는 산책로, 보행광장, 바닥분수, 소공연장을 만들어 주민들의 여가 휴식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50년 된 노후 시설을 정비해 주민들을 위한 시설로 환원시키고 고질적인 야구장 주차장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는 게 시 관계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2022년 4월 완공 계획으로 삽을 떴으나 2023년 2월 현재도 무등 야구장의 리모델링이 완성됐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지자체의 노력이 필요한 곳
한화 이글스도 1986년부터 오랜 시간 사용해 온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를 뒤로하고 대전 베이스볼 드림파크(가칭)를 구상 중이다. 신 구장이 완공되면 빈 구장은 외야 담장을 철거해 평상시에는 아마추어 야구나 자동차 캠핑이 이뤄지는 문화공간으로, 경기가 있는 날에는 그라운드를 개방해 주차장으로 쓰이는 복합 시설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주차장과 문화공간이 협소하다는 기존 구장의 약점을 보완하겠다는 목표다. 하지만 증가한 유동 인구와 무거운 자동차에 밟힌 그라운드가 아마추어 선수들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될지는 미지수다. 2025년에 한화가 이전하는 것을 목표로 착공했다고 하니 그 이후에야 알게 되겠지만, 아마야구 선수들도 정상적인 천연잔디를 사용할 수 있게 하거나 적어도 부상에서 안전한 인조 잔디를 설치하는 등 지자체가 함께 신경 써야 한다.
SSG는 2028년 청라국제도시 부지에 돔구장을 짓고 입주할 계획이다. 청라 돔은 모기업의 복합쇼핑센터와 맞닿게 하고, 일본 닛폰햄 파이터스의 새로운 홈구장 에스콘 필드 홋카이도처럼 사우나에서도 야구를 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전언이다. 랜더스 필드는 원래 대부분의 공공 체육시설과 마찬가지로 인천광역시가 시설의 운영,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학박태환수영장을 뺀 인천 문학경기장 자체를 2023년까지 SSG가 위탁 운영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간이 올해까지인 만큼 구단은 임의로 구장을 개보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청라 돔이 지어지면 국내 최초 민간 소유 돔 경기장이 된다. SK에서 SSG로 이어오며 5번의 우승을 기록하고, 국내 최고라 할 수 있는 전광판 ‘빅보드’를 가진 이곳.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문학 구장만의 분위기를 사랑했던 인천 야구팬들에게, 청라 돔은 어떤 새로운 추억을 선물할지 기대된다.
그러나 겨울마다 리모델링을 통해 팬들의 편의를 살폈던 지금까지와 달리, 인천 야구 박물관을 철거하여 모기업 커피전문점을 만들고 이에 대한 팬들의 물음에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점은 이전 인천 야구 역사를 섣부르게 지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구단은 야구 박물관과 같은 인천 야구의 역사적 공간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또 인천시는 빈 문학 야구장을 어떻게 유지, 보수 및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계획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나 숭의 야구장 철거 당시 인천시는 인천 지역 아마야구 대체 구장 마련을 약속했는데, 인천대공원 근처에 짓는다는 말만 있을 뿐 실제로는 건립되지 않았다. 유정복 현 인천시장은 지난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구장 확충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인천 야구 발전을 위한 정책 협약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 시장은 2022시즌 인천 SSG 랜더스 필드와 팬 페스티벌에서 유난히 자주 얼굴을 비출 뿐, 아마야구 구장이나 야구장 확충에 대한 약속은 아직 지키지 않았다. 인천 야구팬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야구장에 자주 찾아와 손 흔드는 데 그치는 게 아닌, 인천 야구의 역사를 지키고 아마야구 환경의 발전을 생각하는 행정이다.
롯데 자이언츠는 대전과 잠실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사직 야구장을 사용한다. 몇 차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긴 했지만, 시설 낙후로 2020년대 프로야구가 열리기에는 열악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부지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건축 시기에는 인근 아시아드 주 경기장을 개조해서 사용할 예정인데, 현재 이 구장은 K리그2 부산 아이파크가 사용 중이기에 논란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부산 아이파크는 이미 지난해 구덕운동장 잔디 보수를 이유로 홈구장을 사직 아시아드 주 경기장으로 옮긴 바 있지만, 두 경기장의 공사 기간이 겹쳐 또다시 프로축구가 밀려나게 되는 셈이기 때문. 한편 새로운 사직 야구장은 기존 자리에 재건축 방식으로 지을 예정이라 사직과 롯데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가길 기대할 수 있다. 불펜 문을 열고 나오다 손이 찢어지거나 더그아웃에 물이 새는 등 사건 사고가 있기도 했지만, 재건축 후에는 안전한 야구를 할 수 있는, 새롭지만 익숙한 부산의 랜드마크가 되길 바란다.
#공간이 주는 추억
최초의 야구장인 동대문 야구장이 뜨고 졌다. 그러면서 우리는 전국에 새로운 야구장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신 구장들이 생겨나며 관중들이 떠난 야구장, 무조건 새로운 구장으로 이전하는 것만이 좋은 방법일까.
이렇게 KBO 10개 구단 중 무려 9개 팀이 새로운 구장으로 자리를 옮겼거나 옮기게 된다. 빈 야구장은 앞으로도 더 많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옛 구장에 담긴 팬들의 추억은 그 자리 그대로 남아있을 터. 일본 한신 타이거즈의 홈구장인 한신 고시엔 구장은 1924년 개장하여 준공 100주년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도 꾸준한 개보수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매년 봄과 여름에 열리는 전국고교야구대회는 이 구장을 고교야구의 성지로 만들었으며, 고교야구 대회가 열릴 때는 연고 팀인 한신이 다른 구장에서 경기를 치를 정도이다. 고시엔구장 역사관도 새로 생겨 홈팀 한신과 고교야구의 역사를 추억하는 공간도 있다. 우리나라의 ‘고시엔구장’인 동대문 야구장은 이미 사라졌다. 오래돼 낙후됐다면, 그래서 위험하다면 고시엔구장처럼 개보수하면 어떨까. 야구 역사가 이렇게 하나둘 사라진다는 것이 안타깝다. 때때로 첨단 시설, 새것보다도 이야기를 가진 것에 깊은 가치를 가질 때가 있다. 한국 야구의 역사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설화가 아니길, 몸소 느낄 수 있길 바란다.
▲ 더그아웃 매거진 143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3년 143호 (3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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