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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Dream] 롯데 자이언츠 김원중 MEMORIES

dugout*** (dugout***)
2018.08.2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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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야잘잘로 가는 길


 

흔히 야구를 잘하는 야구선수에게 ‘야잘잘’이란 별명을 붙여준다. ‘야잘잘, 야구를 잘하면 잘생겼다’란 뜻이다. 아직까지 유망주란 수식어가 따르지만 이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속도가 빨라 선발의 한 축을 책임질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Photographer Mino Hwang Editor Kwonhyang Pyo Location Sagik Baseball Stadium

 

김원중 (1).jpg

 

1. 실시간 검색어 1위, 선수와 배우가 바뀌었다?

 


 

지난 6월 29일 초록창 실시간 검색어에 김원중이 등장했다. 그 시각 5개 구장에서는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김원중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깜짝 등장한 것. 그가 KIA 타이거즈전 시구자로 나선 배우 이시언의 일일코치로 나서면서 카메라 원샷을 받았다. 이시언은 그와의 첫 만남에서 “엄청 잘생겼다”며 감탄을 반복했고 그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다르빗슈vs덴버, 엉뚱한 반전매력


 

실제로 김원중은 KBO리그 대표 꽃미남으로 통한다. 신인 드래프트 당시 ‘한국의 다르빗슈’라고 불렸다. 롯데 자이언츠 팬 사이에서는 형용사 파생 접미사로 ‘원중하다=잘생겼다’란 말이 생겼다. 반면 동료들은 ‘덴버’라고 부른다. 이 별명에 대해서는 만족하는 것 같다. 잠깐 다르빗슈에서 덴버라는 삼천포로 빠지자면,


 

“공룡 있죠? 옛날에 껌 종이에 스티커 판박이 있던 거! 이용훈 코치님이 아기공룡 덴버 닮았다고 하시면서 지어주셨어요. (본인도 닮았다고 생각해요? 선수들에게 진짜 닮았냐고 물어본다고 하던데?) 사진을 보면 안 닮았는데… 상관없어요. 귀여우니까 맘에 들어요.”


 

본론으로 돌아가서, 팬들은 김원중의 사소한 것까지 궁금해 한다. 지난해 스프링캠프 출국장에서 안경을 끼고 나타난 그의 모습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그 안경이 김원중 25년 인생에 첫 안경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것. 렌즈가 없는 패션안경이라 불편해서 못 쓰겠다고 전했다. 김원중의 시력은 좌우 모두 2.0이다.


 

한참 인터뷰를 이어가던 중 그는 아마추어 시절 외모가 아닌 투구폼이 다르빗슈와 비슷하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고 귀띔했다.


“제가 어릴 때 다르빗슈는 일본에서 제일 잘 던졌던 투수였어요. 미국으로 진출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당시 직구 구속이 150km/h나 나오고 슬라이더는 (팔을 넓게 뻗으며) 이만큼 깊고 커브와 체인지업까지 가지고 있었어요. 정말 완벽한 투수였어요. 항상 다르빗슈처럼 던지고 싶었기에 닮았다고 했을 때 기분이 진짜 좋았어요. 그런 대단한 투수와 비교해준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죠. 진짜 실제로 보고 싶어요. (메이저리그에 가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큰 꿈을 가져야죠!” (웃음)


 

어린 시절 다르빗슈를 보고 자랐다면 지금은 “배울 점이 많은 선배”로 같은 팀의 송승준을 꼽았다. 평소 철저한 자기관리와 구멍 난 마운드의 출혈을 막아주는 베테랑 송승준의 위엄이 돋보인다고 설명했다.


 

“선발 로테이션을 돌다 보면 몸이 힘들고 체력이 떨어지는 시기가 무조건 와요. 하지만 송승준 선배님은 힘든 내색을 전혀 안 하세요. 일 년 내내 주어진 이닝을 소화하고 계세요. 금강불괴라는 말이 있잖아요. 몸 관리를 철저히 하는 부분은 반드시 배울 점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팀을 위해 노력한다면 시즌을 마친 후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죠? 그런 날이 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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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사투리 쓰는 부산 남자

 


 

또 하나는 그의 ‘짬뽕 사투리’를 흥미롭게 본다. 전라도 광주 출신인 김원중은 2012시즌 신인 2차 1라운드에서 롯데의 선택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부산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상도 사투리가 섞였다. 장내 수훈선수 인터뷰 때마다 찰진 전라도 사투리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쓰는 모습을 팬들이 귀여워한다고.

 

 

“평소 광주말을 쓰죠. 겁나! 충분히 많이 써요”라고 말한 김원중이 막간을 이용해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의 차이점에 대해 강의했다. 억양이 전혀 다르다는 그는 “밥 먹었냐↘는 광주말이고, 밥 먹↗었나-는 부산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표준말을 쓰려고 크게 노력하지도 않고 (지금의 사투리를) 딱히 바꿔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고칠 생각이 없어요. 다만 흥분하면 더 많이 나오는데, 그땐 잘 못 알아듣더라고요.”


 

김원중이 자주 출몰하는 곳은 사직구장 내 위치한 카페다. 선배들의 심부름으로 찾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를 핑계로 팬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한 속 깊은 뜻도 담겨있다. 물론 본인이 좋아하는 달달한 음료(바닐라라떼, 아이스초코, 돌체라떼)를 마시기 위해 방문하기도 한다.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그곳에 갔을 때라도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드리고 사인해드리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웃음) 남성팬, 여성팬을 차별하지 않아요. 그러면 팬들이 삐쳐요! 모두 똑같이 감사한 분들이기에 친절하게 대해드려야 돼요. 물론 아기들에게는 좀 더 살갑게 대하는 편이에요.”

 

김원중 (7).jpg

 

2. 병마의 뿌리를 뽑다

 


 

술을 끊은 지 4년째다. 김원중은 부상 방지와 체력 등 몸 상태에 대해 특히 진중한 모습을 보였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러닝을 정해진 루틴대로 최대한 지키고 있다. 이미 긴 재활 시기를 보냈으며 절망적인 말을 들어봤기에 예민할 수밖에. 하지만 어떠한 악한 기운도 하늘이 정한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야구인생에서 첫 고비를 겪다


 

김원중의 놀이터는 태어날 때부터 야구장이었다. 어머니가 태교를 야구로 하셨을 때도, 젖 먹이 시절 찾은 야구장에서도 울지 않고 좋아했다. 천생 야구인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유격수였던 이종범을 좋아했던 그는 유격수와 투수를 겸했다. 유격수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의 야구 스타일은 투수 쪽에 가까웠다. 입단 테스트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투구폼을 지적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예쁘게 야구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퇴골두 골단 분리증, 성장판이 아직 열려있는 덩치 큰 청소년들에게 주로 발생하는데 골반뼈에 끼워져 있는 허벅지 뼈가 빠지는 병이다. 당시 담당 의사는 그의 미래를 장담하지 못했다. 운동선수는 물론 정상생활까지 힘들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나이 13세에 야구선수 인생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슬라이딩을 빵! 했는데 느낌이 (골반뼈가) 빡! 빠진 기분이 들었어요. 감독님께서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투수만 할 수 있었지만, 그땐 아프다고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참고 하다가 증상이 심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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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은인들을 만나다

 


 

그의 부모님이 포기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수소문해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날은 주말이었기에 응급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예약을 하지 못해 제대로 된 진료도 받지 못했다. 속이 타들어갈 때 구원의 손길이 닿았다.


 

“그때 한 레지던트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도와주셔서 다음날 운 좋게 수술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 선생님이 내 야구인생의 은인이지 않을까요.”


 

대수술이었다. 오른쪽 대퇴골두와 골반뼈에 나사못을 박았다. 당시 성장판이 많이 열려있었기에 혹시라도 우려됐던 왼쪽 다리도 같은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그의 대소변까지 받아줬다. 그것보다 누워있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부모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빠, 엄마께서 열정적으로 뒷바라지 해주셨기 때문에 제가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저를 위해 희생하고 계세요. 항상 죄송하고 감사해요.”


 

오랫동안 진행됐던 입원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자 동성중의 강대성 감독이 그를 매일 야구장으로 불렀다. 친구들이 하는 야구를 보기만 해야 했기에 가기 싫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야구의 끈을 안 놓을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회상했다.


 

재활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이어졌다. 그곳에서도 감독과 코치의 배려는 계속됐다. 완치를 위해 학교가 아닌 외부 재활센터에서 치료를 받았다. 일반학생에게는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들의 세계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프로에 못 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겨울에 격하게 운동하다가 잔부상을 입었어요.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며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박강우 코치님께서 많은 조언을 해주셨어요. 코치님이 계셨기에 든든했고 다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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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

 


 

살면서 겪지 않아도 됐을 일을 10대에 전부 겪었지만 혼자가 아니었기에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기적이 하나씩 일어났다.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 3~4개 구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프로 출발역은 반전카드를 뽑은 롯데였다.


 

“솔직히 야구를 못했고 아팠기에 ‘당연히 못 가겠구나’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지명장에 오라는 거예요. ‘뭐지? 뽑아주려나 보다. 뽑아주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가야지’라고 생각하며 기분 좋게 갔어요. 그런데 진짜 뽑혀서 깜짝 놀랐었어요.”


 

김원중의 소식이 궁금했던 건 고려대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대는 김원중에게 입학을 제안했던 유일한 대학이었다.


 

“고려대에서 3라운드 밑으로 받으면 오고, 그보다 윗 순위 지명이면 축하해주면서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지명회의가 끝나고 고려대 감독님께서 축하한다며 열심히 하고 좋은 선수가 되라고 전화를 주셨었어요.”


 

 

3. 정신건강이 야구에 미치는 영향


 

프로 입단 후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하지만 또다시 재활센터에 짐을 풀었다. 재활을 반복하던 중 구단으로부터 입대를 제안 받았고 그 결정을 꺾을 수 없었다. 그땐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를 빨리 다녀온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한다.


 

#.구단의 판단이 옳았다. 군대에서 얻은 깨달음


 

김원중은 롯데의 아픈 손가락인 안태경, 석지형과 함께 구단 내 재활 프로그램을 받았다. 그때 이들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 김성진 퓨처스 컨디셔닝 트레이너다. 김성진 트레이너는 이들의 신체적 재활뿐 아니라 나약해질 수 있는 정신적 재활도 자처했다.


 

마음 같아서는 금방 회복될 것 같았지만 그 속도가 더뎠다. 구단도 원활한 운영을 위해 김원중의 입대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몸이 성하지 않았기에 상무나 경찰청에는 지원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해 6월 상근예비역으로 입대했다.

 

김원중 (5).jpg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야구를 하고 싶어, 끝까지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구단에서는 ‘너 가야 된다’며 저를 설득했어요. 구단 입장에서 보며 다시 생각했어요. 시즌 종료 후 단체훈련 영상을 보는데 제가 아프게 던지고 있더라고요. 제 눈에도 공을 제대로 못 던지는 것이 보였어요. 그럼 감독님과 코치님에게도 다 보일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군대에 갔는데 그때 갔다 오길 잘한 것 같아요.”

 

  

 

부담을 덜어서였을까. 평생 한 야구지만 잠시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서글서글하고 밝은 성격 덕분에 훈련소에서도 쉴 틈 없이 웃음주머니를 터뜨렸다.


 

“훈련소에 가서 총을 한번 쏴봤어요. 한 200발 쐈을 걸요? 총을 못 쏴서 끝까지 남았어요. (웃음) 그런데 어떻게 된 거냐면 조교가 실수했어요. 총알을 똑바로 날아가게 클리크를 조절해야 하는데, 반대로 조정하는 거예요. 내 총알은 저기로 가는데! (…) 아니에요. 변명 아닌 변명이지만, 그냥 제가 총을 못 쏴서….”

 

 

훈련소 퇴소 후 먼저 군대에 다녀온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2년 동안 운동에만 얽매이면 제대를 앞두고 몸과 마음이 지친다는 충고를 받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기에 정신적으로 건강해진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야구에 대한 열정과 소중함 그리고 ‘왜 야구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았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저는 이때까지 좋아하는 야구만 했어요. 야구하면서 행복을 느끼니까요. 술 마시고 노는 것보다 야구장에서 얻는 행복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 보여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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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김투수가 달라졌어요!

 


 

제대 후 2군에서 실전 감각을 끌어올린 김원중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2015년 8월 8일 한화전을 앞두고 첫 1군에 콜업됐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고. 하지만 퓨처스리그에서 선보인 투구와는 달리 1군만 올라오면 자주 흔들렸다. 2015시즌 후반기 15경기 마운드에 올랐고, 2016년에는 단 3경기로 시즌을 마쳤다.


 

김성진 트레이너는 김원중이 마운드 위에서 긴장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면을 발견했다. 대신 구위가 떨어진다는 문제점을 찾았고, 이를 고쳐 잡기 위해 컨디션 조절에 힘썼다. 투구폼을 수정하는 것이 아닌 강한 체력을 길러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합심해 훈련에 돌입했다.


겨우내 이 악물고 몸을 만든 결과, 2017년 마침내 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8월에는 기복 없이 꾸준히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다. 팀에게도 뜻깊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NC 다이노스를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였다. 만우절에 데뷔 첫 승과 함께 거짓말처럼 NC전 15연패를 끊었고, 4승을 달성한 날에는 1099일 만에 NC전 스윕승을 이뤄냈으며, 7승째에는 4년 만에 NC전 상대전적 우세 시즌이라는 값진 승리를 안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선발투수로 확실히 자리 잡지 못 했기 때문에 풀어야할 숙제가 많다. 특히 내년 선발 자원으로 신인 서준원과 이승현 등이 거론되고 있어 안심할 수 없다.


 

“구위가 떨어지면 타자와 승부하는데 그때 힘이 많이 요구돼요. 체력이 안 떨어지도록 컨디션 조절을 잘해서 구위를 유지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어요. 선발투수는 이닝을 많이 끌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한 만큼 마운드 위에서 제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겠다고 다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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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용기로 두려움을 정복하다

 


 

아직까지 긁히는 날과 안 긁히는 날의 차이가 크다고 하지만, 지난 시즌과 확연히 달라진 투구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삼진을 잡을 때는 기가 막힐 정도로 절묘하고도 위력적인 공을 포수 미트에 꽂는다.

 

 

전반기 김원중은 팀 내 탈삼진 1위에 랭크됐다. 2012시즌에 입단한 또래 투수들과 비교해도 삼진 비율이 월등히 높다. 우타자에게는 슬라이더(+커브), 좌타자에게는 스플리터(+체인지업)를 주무기로 삼아 상대 타자의 방망이를 잠재우고 있다.

   

 

서클체인지업의 구위가 떨어졌다는 것을 꼬집어 낸 김원형 코치와 이용훈 코치, 전력분석팀과 연구해 지난 시즌과 달리 시즌 초반부터 포크볼을 던지자고 의견을 모았다. 뜻밖의 포크볼 구사율이 높아지면서 상대 타선을 혼란의 늪에 빠뜨렸다. 또한 큰 키를 이용해 위에서 내려찍는 직구에 무게가 실리면서 위력은 더해졌다.


 

“제 직구를 믿고 자신 있게 던지고 있어요. 더불어 구종이 많이 늘어, 타자 입장에서 직구를 생각했는데 다른 변화구가 나오니까 헛스윙하게 되어 삼진을 당하는 것 같아요. 삼진을 잡는 개수가 많다는 건 구위 자체에 위력이 있다는 뜻이니까 좋은 기록이에요. 하지만 삼진 보다 투구 수를 줄여서 많은 이닝을 끌어가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웃픈(?) 건 가끔 홈런도 시원하게 허용한다는 것이다. 지난 6월 19일 KT 위즈와의 맞대결에서 황재균에게 만루포를 맞았다. 평상시와 달리 무척 괴로워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마운드에서 그런 행동을 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잘 해와 놓고 그 공 하나 잘 못 던져서 맞으니까 제 자신에게 화가 났어요. (글러브를 던지려다가 다시 안던데?) 글러브를 던지는 모습까진 마운드 위에서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절제했어요. 그날 뭐, 화가 많이 났죠. 감사하게도 아무도 말을 안 걸어주시더라고요. 화났을 때 누가 말 거는 것을 안 좋아해서요. 혼자 가만히 있으면 금방 풀려요.” (웃음)


 

5. Thanks to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이들의 도움과 응원을 받았다. 아마 이들이 없었다면 롯데의 김원중은 지금 없을 것이다. 그는 감사한 이들에게 제대로 인사한 적이 없다며 <더그아웃 매거진>을 통해 마음을 전달했다.

 

 

#.‘미우나 고우나’ 형과 아우


 

김원중은 3남 중 장남이다. 3살 어린 동생과 막둥이라고 부르는 6살 아래 동생이 있다.

 

 

야구한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 같아 항상 동생들에게 미안했다. 둘째가 초등학교를 끝으로 야구를 그만 두었을 때도 멀리서만 지켜보며 안쓰러워했다. 집에서는 무뚝뚝한 형이기에 위로해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아직까지 표현이 서툰 형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심에 고개를 떨궜다.

 

 

지난달 군대에 간 막둥이가 눈에 밟히는 듯했다. 김원중은 쑥스러운 듯 “파이팅!”이라고 한 마디를 전했다.

 

김원중 (6).jpg

 

 

#.‘정신적 지주’ 코치님들과 트레이너님들

 


 

김원중은 인터뷰 내내 코칭스태프와 트레이너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열변을 토했다. 이들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① 대수술을 마친 김원중을 학교로 불러 야구의 간절함을 느끼게 해준 동성중의 강대성 감독님

② 부상으로 구속이 130km/h 미만으로 떨어졌을 때 방법을 찾으려 같이 고민해준 동성고의 박강우 코치님

③ 타자와의 승부와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김원형·이용훈 코치님과 모든 투수 코치님

④ 아픈 몸을 고쳐주기 위해 전국의 재활센터를 찾아 치료를 도와줬던 일등공신 김성진 트레이너님

⑤ 항상 신경 써서 필요한 운동을 추천해주고 컨디션을 관리해주는 이영준·김태현 트레이너님

⑥ 겨우내 분신처럼 붙어서 재활과 보강훈련을 도와준 이동호 선생님


김원중은 “이분들이 계셨기에 부상 없이 강한 공을 계속 던질 수 있는 것 같아요. 힘들어하면 제 멘탈을 잡아주시며, 정신적인 부분까지 케어해주시는 분들이십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성적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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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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