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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뜨거운 순간을 기억하라! 이슈&대세

GM수연아빠 (july***)
2015.03.2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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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뜨거운 순간을 기억하라! 그라운드의 이방인

  

 또 하나의 야구영화가 개봉을 하며 우리 곁에 찾아왔다. 이번에는 올드팬들의 향수를 불러오는 이야기 초록의 봉황, 봉황대기 고교야구로 시작하는 영화이다. 한국일보에서 주최하는 봉황대기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는 사회인야구를 즐기는 생활야구인들에게도 결코 낯 선 이름은 아니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 야구팀이 지역예선을 거치지 않고 본선에 진출하는 전무후무한 전국 규모의 대회로 얼마 전까지 고등학교 선수출신자를 구별하는 유일한 판정기준이 바로 봉황대기 출전 유무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잠시 봉황대기 야구대회는 우리 곁에서 전국 사회인야구대회로 명맥을 유지하던 시절이 있었으니 초록의 봉황은 생활야구인과는 참으로 인연이 깊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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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막 대중에 공개된 김명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다큐멘터리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이른바 선진 야구기술을 배우기 위해 기획된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 초청경기”라는 이름으로 초록의 봉황,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야구 좀 한다는 재일동포 학생들을 초청하는 행사로 대회에 참가한 일원이었던 ‘자이니치’들의 추억을 다른 영화이다. 제12회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상대로 준우승을 거머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 무려 30여년 만에 재회한 “1982년 재일동포 대표팀” 그들이 들려주는 열여덟, 열아홉 까까머리 고교생들의 기억속의 야구이야기가 시작된다. 과연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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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은 한국야구에 있어 어떤 의미일까?

 

 프로야구 팬들에게 1982년은 상당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당시 잠실야구장을 들썩이게 만든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보여 준 김재박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극적인 쓰리런 홈런으로 인해 야구의 국민적인 인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던 시기. 더욱이 민주화의 열망이 뜨거웠던 5공화국 시절 전두환 정부는 국민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1982년 한국 프로야구(KBO)를 출범시키기로 결정했고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고교야구, 그 중에서도 봉황대기 결승전이 프로야구 흥행몰이의 일환으로 동대문야구장이 아닌 잠실야구장으로 무대를 옯겨 개최되기에 이른다. 이 후 프로야구에 밀려 찬밥신세로 전락해 버린 고교야구의 인기하락으로 인해 전국규모의 고교야구 대회 결승전이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것은 결국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이벤트가 되어 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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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제12회 봉황대기의 패권은 당시 2학년임에도 팀의 에이스로 명성을 날리며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 팔색조 조계현(현 기아코치)이 이끄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결승에 선착해 있었고 양시철이라는 투수가 홀로 모든 경기를 책임져야만 했던 재일동포 선수단은 대회직전 최약체라는 예상을 뒤엎고 일본야구 특유의 짜임새로 당시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강호 천안북일고, 광주일고 등을 차례로 연파하면서 마침내 전무후무한 사건인 잠실야구장에서 펼쳐진 결승전에서 최강전력의 군산상고와 맞붙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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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조계현은 한국 최고의 초 고교급 투수로 대구고와의 준준결승에서 무려 18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는 엄청난 위력을 선보이면서 파죽지세의 기세를 이어 간 것은 물론 결승전이 열린 잠실야구장은 마치 한일전을 방불케 하는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마침내 초록의 봉황을 품에 안으며 대회 최우수 선수상을 받는 본인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결승전의 상대였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단지 한국말이 서툴다는 이유로 일본식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예상보다 더 잘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반쪽짜리 한국인” 혹은 “반쪽바리”라는 마음의 상처를 받고 아쉽게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당시의 분위기로는 일본에서 온 이 어린 선수들에게 “우승”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것은 실력이외의 또 다른 장벽이 존재했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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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오로지 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시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남아 있지 않았던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6년부터 IMF 경제 위기로 초청행사가 중단된 1997년까지 42년간 여름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모국을 줄기차게 방문하여 야구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야구의 기술과 당시로서는 귀하디귀한 야구 장비를 전해 주었고 이는 지금의 야구발전의 기초가 된 것이다.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주인공이 된 1982년 봉황대기 대회에 참가한 “재일동포 야구단”을 필두로 1971년부터 개치된 봉황대기 대회에서 일본선발팀은 총 3회의 준우승이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무려 42년이란 시간동안 현해탄을 건너 모국에서 선진야구를 전파한 재일동포 학생들은 모두 620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단지 “재일동포”라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잠시 잊고 있던 이 들의 슬프고도 가슴 아픈 역사속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이다.

 

실업야구와 프로야구를 거쳐 간 재일동포 선수들

 

 한국야구의 역사를 천천히 살펴보면 재일동포 선수들의 맹활약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프로야구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KBO의 전무후무한 30승을 기록한 너구리 장명부는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배경이 된 다음해인 1983년 당시 100경기에 불과한 정규시즌에서 총 60경기에 등판하여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평균자책점이 2.34이였음은 물론 완투경기가 총 36회 완봉승이 5번 기록한 괴물 투수였다.

 

 유독 야간경기에 강해 황금박쥐라는 별명으로 한국시리즈 4승의 대기록 직전까지 다가갔던 삼성 라이온스의 재일동포 투수 김일융은 고교시절 고시엔대회에서 팀을 준우승으로 이끈 맹활약을 펼쳤지만 단지 “한국 국적자” 라는 이유로 일본 드래프트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던 독특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00년대 SK왕조를 이끌었던 살아있는 전설 야신 김성근 감독 역시 재일동포 야구단의 친선경기를 통해 모국을 방문했다가 러브콜을 받고 한국에 정착하게 된다. 아마도 재일동포 야구단은 누적관중 1억 명의 최고의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한 지금의 한국프로야구의 중흥기를 만든 숨은 조력자들이였던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용병선수” 이상의 의미로는 기억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진한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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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야구(KBO)가 출범하기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1959년까지 변변한 야구장 하나 없이 야구 불모지나 다름없던 초장기 한국야구가 동대문 야구장이 서서히 제 모습을 갖춘 이후 어느 정도 틀을 만들고 야구경기 다운 모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선수들과는 클래스가 다른 실력을 가진 김영덕, 김성근, 신용균, 배수찬 등의 재일동포 선수들이 6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한 단계 높은 기량을 발휘하며 고국 야구 발전에 공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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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중 근대 한국야구사의 흑역사로 기억될 선수는 배수찬 선수이다. 야구 발전이라는 목표를 내세우고 선진 야구를 받아들이기로 한 정부의 요청으로 제2회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 방문 초청경기'때. 모국 땅을 처음 밟은 촉망받은 야구선수였던 배수찬은 이후 한국야구에 정착하며 실업야구에서 전설적인 존재를 입지를 다지게 된다. 하지만 남북갈등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이념의 희생양이 된 배수찬은 일본에 살던 가족이 북송선을 탔다는 이유만으로 서슬 퍼런 공안정국에 끌려가 며칠간의 모진 고문을 받으며 더 이상 선수생활을 온전히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돌연 도망치듯이 아르헨티나 이민 직후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한국 야구발전이라는 명목하여 조국의 부름을 받았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던 시절 “반공방첩” 이리는 미명아래 국가에 의해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린 재일동포 청년을 기억하기에는 당시의 시대가 성숙하지 못했고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우리와는 다른 이방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과연 이 영화는 야구를 소재로 다룬 영화가 맞는가?

 

 사실 이 영화를 지켜보면서 드는 의문이 하나 생기게 된다. <그라운드의 이방인>이라는 제목처럼 야구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그 때 야구의 향수에 흠뻑 빠져들고픈 스토리를 기대한 야구팬들에게는 야구 외적인 이야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7년이란 시간동안 이 영화를 준비하고 직접 일본으로 날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발로 뛰며 다큐 영상을 기록한 김명준 감독은 자신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독립영화시장의 한 획을 그은 최고의 흥행작인 또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2006)에서는 조총련계 학교 학생들의 삶을 조명한 전적을 가진 독립영화 감독이다. 일본과 한국 양 쪽 모두 소외받고 어울리지 못하며 양쪽의 경계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 즉 “자이니치의 문제”에 대한 깊은 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다. 오랜 시간 동안 고국에서는 '쪽바리'라는 비아냥에 시달리고 정작 그들의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일본인과는 다른 차별을 받아야 했던 재일동포들을 재조명하는데 야구란 소재가 적극 활용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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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야구를 좋아하는 생활야구인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내용이 많고 나름 한국 야구를 잘 안다고 자부했던 사람들마저도 깜짝 놀랄만한 역사적인 사실과 희미한 추억을 되살리는 오래된 야구이야기가 제법 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의 적지 않은 런닝 타임이 차별받고 살아가는 자이니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민단, 조총련과 같은 보통의 야구팬들이 기대했던 본격적인 야구 이야기와는 다소 거리가 먼 무거운 주제가 깊숙이 녹아 있음은 미리 알고 영화를 즐기는 편이 좀 더 바람직 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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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재일동포 야구단의 멤버였던 양시철, 김근, 권인지 등, 서로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던 이름들을 모두 찾아내 한자리에 모아 유쾌한 술자리를 마련해주고 오로지 뜨거운 야구의 열정 하나만 생각하고 현해탄을 건너 모국을 찾았을 그 들의 청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잠실야구장에 마운드에 다시 세운 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가진 의미는 충분하다. 도한 그렇게 우리의 필요에 의해 이용되고 쓰임새와 유효기간이 다 되었다고 잊혀져간 또 다른 이방인으로 버려진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에게 조그만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이제 우리에게도 뭔가 특별한 시구가 필요하다!

 

 영화의 종반부인 피날레 순간, 1982년 까까머리로 고국의 부름을 받았던 십대의 재일동포 고교야구선수들은 무려 32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다시 고국의 마운드인 잠실야구장에서 시구를 하기 위해 경기장에 다시 나서게 된다. 막 걸음마를 뗀 한국야구의 태동기에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데 힘을 보탠 숨은 공로자인 “재일동포 야구단”이 이제는 세계야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성장한 한국야구와 다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살아있는 역사 속에 생생히 숨 쉬고 있는 이 땅에 야구의 혼을 전해 준 “야구선구자”에 대한 조그만 배려이자 고마움을 표시한 의미 있는 자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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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언제부터인가 프로야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KBO의 시구행사는 연예인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고 어떻게 든 독특한 시구 장면을 연출해서 한 방에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일단 눈에 튀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목적을 가진 홍보 수단으로 전략해버린 지 오래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다소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몸동작으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우리가 야구경기에 열광하고 즐거움을 만끽하기 전에 워밍업을 하는 준비과정의 일부라고는 치부해도 이제 야구장에서도 무언가 스토리텔링이 필요하지 않을까? 평생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 질 수 있는 이벤트로써 시구행사가 팬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더욱 가깝게 다가가는 바람직한 사례로 <그라운드의 이방인>속의 의미있는 시구행사가 기억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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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어려워하던 시절, 기꺼이 모국의 야구발전을 위해 한국행을 택했지만 양국 모두에서 오히려 온전치 못한 반쪽 취급을 받으면서 <그라운드의 이방인>으로 기억되어야 했던 재일동포 선수들이 있었음을 지금이라도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영화가 만들어 졌다는 것에 박수를 치고 싶다. 조금은 서툴고 투박하고 낯선 흥행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다큐멘터리 영화지만 이제 막 개봉을 시작한 코 끝 징한 야구 이야기가 녹아 있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을 생활야구인의 이름으로 금주의 이슈앤대세의 대세 키워드로 선정해 본다. 혹시라도 영화를 직접 스크린에서 느껴 보고 싶다면 조금 서두르는 편이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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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 등급 달아요
    • 2015.03.20 20:42
    • 답글

    글 재밌게 봤습니다 :) 근데 요즘 황금사자기 결승전이 잠실야구장에사 치뤄지고 있습니다 ㅎㅎ

    • 등급 GM수연아빠
    • 2015.03.20 20:48
    • 답글

    아! 그걸 놓쳤네요~ 처음이자 마지막 이벤트가 아니라 첫번째 이벤트로 정정합니다! 역시 달아요님은 고교야구박사

  • 양시철선수 전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키킹때 축발 발꿈치를 살짝 들던 투구폼... 정말 멋진선수였던 기억인데 일본프로야구서 성공할줄 알았는데 지금 뭐하는지 참 궁금하네요

    • 등급 GM수연아빠
    • 2015.03.23 11:51
    • 답글

    양시철선수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셨네요! 고교졸업 이후론 야구는 안 하시는 모양입니다!

  • 안타깝네요... 정말 재능이 있는 선수로 보였는데...

  • 올란도 에르난데스를 연상시키는 폼이었죠...

    • 등급 김남영
    • 2015.03.26 16:27
    • 답글

    군산출신으로서 조계현선수가 활약하던때의 그 뜨거움을 잊지 못하겠네요. ^^

  • 좋은글이네요.

    • 등급 최정필
    • 2015.03.29 22:20
    • 답글

    아하...~~~~ 좋은글 감사합니다.^^

  • 글 넘 잘 읽었습니다 . . 예전 경기 모습 떠올리니 소름 끼치네요. . ㅎ

    • 등급 변학연
    • 2015.05.04 21:54
    • 답글

    조은글감사합니다..너무나공감가는글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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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급 닉네임 어쩌고
  • 2014.03.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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