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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야구 취재기 上] ‘분데스리거’ 강봉규의 야구 인생 이야기 비즈볼프로젝트

류지호 (gulakk***)
2016.07.13 23:05
  • 조회 9541
  • 하이파이브 6

[비즈볼 프로젝트 김민환] 이야기를 한참이나 듣다가, 꿈이 무어냐고 물었다. 한국나이로 39세.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맞은 베테랑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 분데스리거라는 수식어에 걸맞지 않게 심상했다. 그럼에도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그 꿈이 특별하게 들린 것은, 적잖은 역경 속에서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온 그의 진심이 그 대답에 무겁게 묻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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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 자신의 타석을 기다리는 강봉규. 한국에서 24번을 주로 달던 강봉규는 독일에서 29번 유니폼을 입고 있다.

 

 

부산 야구천재의 화려했던 아마추어 시절


사실 강봉규 야구 인생의 시작은 역경이나 시련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직구장 주변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야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그는 부모님을 졸라 시작한 야구에서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다. 스스로도 ‘야구 감각은 있었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강봉규는 또래 중에서도 야구 잘하기로는 꽤나 유명했던 선수였던 것이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으레 그렇듯, 경남고에 진학한 강봉규 역시 팀의 최고 투수이자 타자였다. 아시아 청소년 대표팀, 세계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그는 투수로 뽑혀서 타자로 뛰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렇게 부산 경남 지역의 손꼽히는 유망주였던 그를 두고 당시 OB 베어스와 고려대는 살벌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스카우팅 비화 하나. 강봉규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5년 고려대는 가등록한 고교졸업반 선수들을 프로팀의 지독한 스카우트 공세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프로구단들이 찾을 수 없는 부산의 외딴 곳으로 이 선수들을 ‘납치’해 갔다고.(물론 입학을 희망하는 본인과 부모님의 동의를 받은 일이었다) 경남고의 강봉규를 비롯, 당시 전국 넘버원 투수 유망주였던 휘문고의 김선우, 광주일고의 김상훈, 인천고의 박진만 등 각 지역의 야구천재들을 꽁꽁 숨긴 고려대는 결국 이 선수들 대부분을 입학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훗날 국민 유격수로 성장하는 박진만은 ‘피난’이 끝난 후 신체검사를 위해 잠시 인천 병무청을 방문했을 때 현대 스카우트 팀에게 또 다시 ‘납치’되어 결국 프로행을 선택하게 된다. 아직까지 전설로 기억되는 ‘박진만 스카우트 대작전’이다.)


“프로에 직행한 진만이형(같은 학년이었지만 1년 유급으로 한 살이 더 많은 박진만을 동기들은 ‘형’이라 부른다)이 미래를 잘 내다 본거다” 라며 당시를 회상하며 웃는 강봉규였지만, 그는 지역의 대표 스타 유망주로 대학에 입학해 국가대표로 뛰다 프로에 입단하는 당시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였다. 방콕 아시안 게임에 대학 선수로서 뽑혀 병역 혜택을 받은 것도 고려대 재학 중의 일이었다.


웃지 못할 촌극 끝에 고려대에 입학한 강봉규는 곧장 고려대 야구부의 황금기를 이끈다. 90년대 초반부터 국가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이 다수 포진했던 고려대의 최전성기 중 입학하게 된 강봉규에게 당시는 야구가 정말 재미있던 시기였단다. 실제로 그는 대학에서 손민한, 진갑용, 김동주, 손인호, 송신영, 김선우, 최희섭, 박용택, 이택근 등 당대 대학 무대 최고의 선수들이자 훗날 프로에서도 큰 족적을 남긴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며 4년 간 6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게 된다.


거칠 것 없었던 스타군단 사이에서도 강봉규는 1학년 때는 1루수로, 그 후에는 3루수로 꾸준히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4학년 때는 특유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팀의 주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후배 박용택은 한 대학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주장 강봉규를 두고 “FM적이고 솔선수범했던 주장”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강봉규는 스스로도 본인의 성격을 “이상할 걸 못 보는 답답한 성격”이라고 겸손하게 설명했다. 타고난 운동신경에 또래 중에서도 눈에 띄는 성품까지 갖춘 대형 대졸 내야수의 시선은, 이제 프로 무대를 향하고 있었다.


 

프로 진출, 그리고 첫 번째 좌절


실패를 몰랐던 선수 인생에 ‘제2의 김동주’라는 언론의 평가까지, 2000년 두산에 입단한 강봉규는 프로에서도 가장 주목 받는 신인 선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얄궂게도, 그런 본인과 주변의 기대는 좌절로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는 야구가 재미없었어. 방황도 좀 했었지. 아마추어 때는 나름 승승장구했는데 프로오니까 원하는 대로 야구가 안되고 뭔가 벽이 있는 느낌이더라고. 잘 안되니까 야구에 흥미를 잃어버린 거지.” 스스로 ‘프로의 벽에 부딪혔다’고 회상하는 당시의 좌절은, 사실은 아마추어 무대에서 난다 긴다 했던 선수들이 흔히 겪는 성장통이었다. 그런데 강봉규가 남달랐던 것은, 그 좌절을 스스로 한 발 더 성장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프로무대 성장통을 극복하는 계기는 의도치 않은 포지션 변경이었다. 김동주가 버티던 3루 포지션 대신 영문도 모른 채 김광수 코치의 지시로 우연히 잡았던 외야 글러브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발판이 된 것이다. 투수 출신의 강한 어깨와 탁월한 운동능력을 갖추었던 그에게 새로운 포지션은 딱 맞는 옷과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서 뛰어다녔다”는 20대 중반의 강봉규에게 포지션 변경은 생소함보단 새로운 도전과 흥미로 다가왔다. 프로 2년 차 선수로 2001 한국 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며 팀의 우승 맴버로 이름을 알리고, 팀의 새로운 활력소로 불리며 1군에서 조금씩 기회를 받은 것도 이맘때 즈음이었다.


 

프로에서 자리 잡을 무렵, 그를 찾아온 또 다른 좌절


거리낄 것이 없어 보였다. 타격 능력을 갖춘 다재다능한 신인의 등장에 언론과 팬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정수근, 장원진 등 주전 선수들의 부상에 적잖은 기회도 받았고, 김인식 감독의 신뢰도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창창해 보이던 ‘외야수 강봉규’의 미래에 다시금 먹구름이 드리운 건 2003년 개막 후 11경기가 지난 시점, 이후 평생을 따라다닌 지독한 부상 악령이 덮친 때였다.


강봉규는 아직도 2003년을 야구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으로 기억했다. 송원국 등과 함께 팀의 세대교체를 이끌 선두주자로 떠오르며 직전 해 받았던 185타석 이상의 기회가 보장될 것이 확실시 되었을 무렵, 잔인하게도 그의 야구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손목 부상이 닥친 탓이다.


화불단행이라고, 지난한 재활을 거치고 돌아 온 강봉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야박하게도 또 다른 부상이었다. 2004년 복귀하고 1달 여, 이제 방망이가 조금 맞는다 싶으니 이번에는 어깨가 말썽이었다. 결국 수술대에 오른 강봉규는, 프로에 데뷔했을 때 겪었던 좌절과는 차원이 다른 심각한 위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때의 수술 이후로 지금까지 어깨는 단 한번도 정상인 적이 없었단다.


몸이 아프니 원하는 대로 야구가 될 리 없었다. 어느새 서른을 향해 가는 나이, 선수 생활의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가야 할 시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픈 몸을 가지고 줄어만 가는 기회에 한숨 짓는 것뿐이었다. 또 다시, 야구가 재미가 없어졌다. 이번에는 진지하게 선수 생활의 끝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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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구가 된 트레이드, 그리고 화양연화


‘그저 그랬던 흔한 야구 선수’로 남을 뻔했던 위기의 순간. 하지만 이번 역경의 돌파구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나왔다. 우타 외야수의 필요성을 절감한 삼성이 아픈 손가락이던 강동우를 내주면서 강봉규와 김창희를 받는 2대1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이다.


동기부여가 힘든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강봉규에게 트레이드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트레이드 통보를 받고도 두산에 대한 서운함이나 새로운 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또 다른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기대가 앞섰단다. 그리고 3년 동안, 강봉규는 주로 좌투상대 대타 요원으로 1군 붙박이 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06~08시즌 wRC+ 100.7 / 110.6 / 118.3) 삼성이 팀 역사상 최악의 공격력을 보여줬던 시기, 적은 기회에서도 빼어난 타격 능력을 보여준 덕분에 강봉규는 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선수가 되었다.


그렇게 2009 시즌이 시작되었다. 베이징 올림픽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절, 박용택과 홍성흔이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타율왕 경쟁을 하고, 김성근 감독의 스몰볼과 김경문, 로이스터 감독의 빅볼이 서로 다른 색으로 각축을 벌였으며,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타이거즈가 더 없이 극적으로 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그 해였다.


화려했던 이 해는, 무던하고 성실했던 준주전급 외야수의 인생의 화양연화이기도 했다. 단 한번도 주전으로 뛰어보지 못했던 만년 백업 선수였던 강봉규로서는 풀타임 주전으로 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한 시기일 만했다. 헌데 그 기회를 잡은 그는 리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활약으로 그 기회를 화려하게, 눈부시게 불태웠다. (.310/ .405/ .506/ .911, 20홈런 78타점 20도루)


무엇이 달라졌냐는 질문에 달라진 건 하나뿐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특별했던 건 단 하나였어. 내가 매일 주전으로 나간다는 것. 내가 오늘도, 내일도 게임에 선발로 나갈 수 있다는 것. 그전까지는 한 타석 한 타석 살기 위해서 들어섰다고. 그런데 그렇게 살기 위해 야구하지 않아도 내 자리가 있으니 이제는 내가 야구를 즐길 수 있었던 거지”.


올스타급 활약에 팀 내 대우도 달라졌다. 시즌 후 연봉협상에서 프로 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억대 연봉자 반열에 올라섰고 팀을 이끌 주장의 책임도 함께 주어졌다. 데뷔 후 처음으로 연말 시상식에 초대되어 페어플레이상을 받았으며,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에서 4위로 차점자에 오르며 이때의 활약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스스로 “그래도 내가 받을 줄 알았다”며 웃었다.) 오키나와 캠프에서 현재의 아내 김연주 씨를 만난 것도 이맘때였다. 영광보다는 아픔과 시련이 잦았던 프로 생활 끝에 뒤늦게 피운 꽃은, 그렇기에 더 화려하고 달콤했던 것이다.


 

선수 생활의 막바지, 또 다시 시련이 닥치다


그렇게 늦깎이 스타로 자리잡나 싶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옛말처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빛을 받지 못했지만 결국 시련을 이기고 우뚝 선 드라마 주인공처럼, 선수 생활의 꽃을 피우는 듯했다. 그런데 원망스럽게도, 시련은 이번에도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주전으로 맞은 2010 시즌의 시작이 좋지 않았다. 2009년의 갑작스러운 타고 현상에 스트라이크 존 조정이 논의되었는데, 많은 선수들이 변경된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하지 못했고 강봉규도 그 중 하나였다. 특히나 3월 31일 평소 그라운드 안팎에서 좀처럼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가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며 퇴장 당하는 장면은 안 풀리던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존 때문은 아니었다. 타격감이 이상하게 안 좋았는데 안 풀리려니 정말 아무것도 안 되더라.”며 당시를 떠올리던 강봉규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났다. (실제로 2010시즌 강봉규의 BABIP는 .276으로 부상으로 신음했던 2013년을 제외하면 커리어 중 가장 낮은 수치였다.) 시즌 초의 부진을 채 만회하기도 전에 시즌은 끝나버렸고, 한국시리즈에서 팀은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한 시즌의 부진으로 그가 ‘역경을 맞았다’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진짜 시련은 그 후에 또 다시 닥친 지긋지긋한 부상이었다. 2011년 시범경기 도중 김상수와 부딪혀 당한 손톱뼈 골절로 수술을 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재활 후 복귀해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경기의 유일한 득점을 홈런으로 만들며 팀의 우승을 이끌 때까지만 해도 손가락 부상은 지나가는 사소한 부상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 후 다시금 재발한 어깨 부상이었다. 어깨 부상으로 스프링 캠프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 10여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게다가 어느덧 30대 중반에 다다른 나이 탓에 재활이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2군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부상을 안고 있는 노장에게 기회를 줄 만큼 팀 상황이 녹록지도 않았다. 이제서야 밝힐 수 있는 이야기지만, 팀에 트레이드를 요구하며 갈등이 있었고 때문에 심적으로도 지친 상태였다.


“구단과 입장이 달랐을 뿐이지 뭐. 구단은 구단 입장에서 팀을 꾸려가야 하고 나는 나대로 야구를 하고 싶으니까.” 결국 서로의 입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삼성과 강봉규는, 2015 시즌이 끝나고 결별하게 된다. 그때는 이것이 KBO에서의 마지막일지 몰랐지만, 우여곡절 많았던 16년 동안의 KBO 생활이 끝난 것도 이때였다.


한국에서 야구를 더 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은 걸 느꼈단다. 육성이 지상과제가 된 KBO 리그에서 부상경력이 있는 베테랑 외야수를 원하는 팀은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이렇게 야구를 그만할 수는 없겠다 싶었다.


백방으로 야구할 곳을 알아보던 도중, 2014년까지 팀메이트였던 릭 밴덴헐크와 연락이 닿았다. 네덜란드 본토 출생으로 유럽야구에 연이 있는 밴덴헐크가 유럽에서 야구하기를 권유했고, 현재의 팀인 독일의 부흐빈더 레기오내레 팀을 소개해 줬단다. 불혹을 앞둔 나이에 생소한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독일에서의 새로운 출발, 쉽지 않은 도전


야구를 포기하고 싶었던 여러 역경들을 이겨낸 강봉규였지만, 이번 시련의 무게는 남달라 보인다. 불혹에 다다른 나이와 오랜 부상으로 말을 듣지 않는 몸도 문제였지만, 새로 적응해야 할 것 투성이인 독일 리그는 프로 선수 출신이었던 그가 뛰기에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큰 꿈을 안고 왔던 강봉규는 실제로 경기를 치르면서 많은 좌절을 느끼기도 했단다.


하지만 시련을 기회로 삼아 더 큰 선수가 되었던 그의 프로생활 이야기를 듣고서는, 지금 그가 느끼는 좌절 역시 그의 인생을 성장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서두에 언급했던 꿈을 말하는 강봉규의 눈빛이 무던하지만 강인하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경험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는, 이미 시련 뒤에 있을 기회를 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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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만하임 토네이도스와의 경기에서 타석에 들어선 강봉규. 이날 강봉규는 2개의 안타와 볼넷 하나를 골라내며 활약했다.


 

오늘도 버틴다, 강봉규답게

 

인터뷰 말미, 강봉규는 스스로의 프로 생활을 되돌아 보며 “잘 버텨냈다”고 표현했다. 부상과 수술, 재활로 성한 곳이 없는 몸으로 1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잘 버텨냈다는 말임과 동시에 매 순간 꾸준히 최선을 다했다는 뜻도 담고 있는 말이었다.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그의 선수인생이 꽤나 매력적으로 보인 것도 어쩌면 묵묵히 ‘버텨냈던’ 그의 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특별한 도전을 하면서도 담담하게 힘들지만 버티고 있노라고 말했다. 새로운 무대에서도, 더없이 강봉규다운 모습이었다.


* 하 편에서 독일에서 직접 취재한 강봉규의 독일 생활과 독일의 야구 리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진= 비즈볼 프로젝트 김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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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강봉규, 독일야구, 분데스리거

    • 등급 꾹이님
    • 2016.07.21 08:54
    • 답글

    건강하게 선수생활 이어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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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급 닉네임 어쩌고
  • 2014.03.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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