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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시즌을 한 경기로 축약한다면 잔여 경기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지금이 9회 말에 해당하지 않을까. 가을야구 티켓을 향한 순위 싸움이 점입가경으로 치달으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이런 치열한 시기엔 간혹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라는 명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판을 뒤흔드는 반전의 팀이 등장하곤 한다. 현재까지는 두산 베어스가 올해의 주인공이다. 8월까지 총 승패 마진이 –5에 불과했던 그들은 9월 한 달간 16승 8패로 무서운 질주를 선보였고, 순위도 7위에서 4위까지 끌어올리며 상위권을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무서운 뒷심으로 팬들에게 짜릿함을 선사한 주인공엔 어떤 팀이 있었는지 겹겹이 쌓인 이야기들을 되짚어보려 한다. (10월 13일 작성)
에디터 이찬우 사진 두산 베어스
#2021년, 본토의 돌아온 가을 좀비
비록 바다 건너 메이저리그의 이야기고 당장 올해 펼쳐진 일이었지만, 이번 주제에서 이 팀을 논하지 않으면 섭섭하겠다. 바로 기적 같은 17연승으로 포스트시즌 막차를 탄 김광현의 소속팀, MLB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다.
개막 전 탄탄한 투수진에 힘입어 호성적이 예상됐던 세인트루이스. 일각에서는 총 11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명문 구단의 명성을 올해도 이어갈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달랐다. 선발진은 부상과 부진이 겹쳐 붕괴 수준에 이르렀고 과부하가 걸린 불펜 운용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거듭된 악재 속에 7월 말까지 간신히 5할 승률을 맞추는 데 그쳐, 내셔널리그의 3개 지구 우승팀 외에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는 두 팀에게만 주어지는 와일드카드 티켓도 요원해 보였다. 그렇게 2021년은 전통의 강호 카디널스에게 아쉬움으로 남을 한 해가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날이 선선해질 때만 되면 강해져 ‘가을 좀비’란 별명을 가진 그들의 반격은 역시나 약속의 9월에 펼쳐졌다. 9월 12일부터 29일까지 이어진 17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는, 구단 역사상 최장 기록은 물론 13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서도 3위에 해당하는 연승 가도를 달려 포스트시즌 막차를 탄 것이다. 페넌트 레이스 최종 성적은 중부지구 2위에 0.556의 승률. 이는 동부지구 1위 팀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보다도 오히려 높은 수치였다. 비록 LA 다저스와의 와일드카드 게임에서 패해 그들의 가을야구는 한 경기 만에 끝났지만, 기적을 선보인 카디널스는 박수 속에 화려하게 퇴장했다.
#2019년, 가장 극적인 우승
MLB에 세인트루이스가 있다면 KBO리그엔 두산이 있지 않을까. 2019년은 리그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역전 우승팀이 탄생한 해였다. 앞선 카디널스의 사례가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면, 베어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념으로 드라마를 써냈다. 정규리그 종료까지 33경기를 남겨두고 선두 SK 와이번스와 최대 9경기까지 격차가 벌어졌으나,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착실히 승수를 쌓아나갔다. 기적은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이뤄진다고 했던가. 거짓말처럼 SK가 9월 중순 두산과의 더블헤더 매치를 모두 내주는 등 6연패의 부진에 빠지며 양 팀의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선두권은 일순간 살얼음판 같은 경쟁 체제에 돌입했고, 결국 SK가 144게임을 모두 마친 상황에서 NC 다이노스와 두산의 최종전 결과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 나게 됐다.
단두대 매치가 벌어지는 잠실야구장엔 최종전을 치르는 양 팀뿐 아니라, 이 한 게임에 운명이 걸린 와이번스 팬들까지 모여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또한,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앞두고 있던 NC가 예상외로 전력을 다하며 손에 땀을 쥐는 끝장 승부가 펼쳐졌다. 3회와 4회 NC가 한 점씩을 뽑아내며 기선제압에 성공했으나 추가 득점엔 실패했고, 홈팀이 추격하며 7회까지 팽팽한 균형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어진 8회 초. 공룡 군단이 총력전을 펼치는 상대 불펜을 두들겨 3점을 뽑아내며 승기를 목전에 뒀다.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확신하는 와이번스 팬들의 표정엔 안도의 미소가, 기적의 문턱에서 패색이 짙어진 홈팀의 관중석엔 적막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미 무서운 집념으로 9게임 차를 좁힌 곰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8회 말 추격의 불꽃을 살려 만들어진 스코어 5대 4, 2사 1루의 상황. 대타 김인태가 우중간을 가르는 3루타를 쳐내며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었고, 이어지는 9회 초를 무사히 넘긴 후 9회 말을 맞이했다. 그리고 1사 2루 기회에서 타석에 들어선 박세혁이 초구에 과감히 배트를 휘둘렀고, 이 타구는 2루수 옆을 빠져나가며 각본 없는 드라마의 마침표를 찍었다. KBO리그 역대 최초 끝내기 안타로 정규시즌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자, 1년 전 한국시리즈에서 통한의 역스윕으로 흘린 눈물이 감격의 눈물로 바뀌는 밤이었다. 이때의 믿을 수 없는 역전이 있었기에 모든 야구팬이 올해 미라클 두산의 반등에 신경을 더 곤두세우는 걸지도 모르겠다.
#2017년, 진격의 거인
매년 멀어져 가는 가을야구행 열차를 바라보며 아쉬움이 클 롯데 자이언츠 팬들. 그런 그들의 가슴을 뜨거워지게 했던,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은 한 해가 있으니 바로 2017년이다. 2013년 이후 줄곧 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롯데가 오래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연도라는 점에서 이미 뜻깊지만, 그 과정에서 보고도 믿기 힘든 대반격을 펼치며 온 구장에 거인의 위용을 떨쳤다는 사실이 팬들의 마음을 더욱 들끓게 했을 것이다.
항상 괜찮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후반기에 들어서면 뒷심 부족으로 기세가 꺾이던 롯데. 2017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7월까지는 47승 48패로 5할 승률에 미치지 못했으며, LG 트윈스와의 8월 첫 시리즈에서 싹쓸이를 당하며 5강 싸움의 호흡기를 떼는 듯했다. 하지만 그 뒤로 누구도 막지 못한 거인 군단의 진격이 시작됐다. LG와의 시리즈 이후 8월 성적은 무려 19승 5패. 해당 기간에 마찬가지로 무서운 상승세를 타던 두산과 몇 달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던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를 모조리 스윕하는 저력을 선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넥센 히어로즈의 앤디 밴 헤켄, 두산의 마이클 보우덴, KIA의 양현종과 헥터 노에시, LG의 차우찬과 헨리 소사 등 상대 에이스 투수들을 연이어 무너뜨리며 전 구단에 경계 대상 1호로 떠올랐다.
롯데의 기세는 다음 달에도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9월의 첫날부터 최종전이 열린 10월 1일까지 한 달간 14승 6패를 기록하며 가을의 부산을 여름보다 더 뜨겁게 만들었다. 7위에 머물렀던 순위는 최종 3위까지 수직으로 상승했고, 가을야구 문턱이라도 밟을 수 있길 기도하던 자이언츠 팬들은 플레이오프를 맞이해 사직야구장을 동백의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오랜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그들의 이야기는 더 오래 이어지진 못했지만, 자부심을 품기 충분한 한 해였다. 구단 역대 최다 승수인 80승 달성, 마지막 두 달간 33승 14패를 거두는 무시무시한 진격, 돌아온 거인의 심장 이대호와 함께 이뤄낸 5년 만의 가을야구 복귀 등 영광스러운 성과가 많았으니 말이다.
#2016년, 젊음의 패기로 만들어낸 역전극
KBO리그에서 리빌딩 선언은 흔히 성적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2015년에 줄곧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LG는 시즌 중반부터 리빌딩 모드에 돌입했고 이러한 기조는 이듬해에도 이어졌다. 매 경기 선발 라인업은 박용택을 포함한 일부 베테랑을 제외하곤 대부분 생소한 이름들로 채워졌고, 익숙한 고참들의 얼굴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확 바뀐 트윈스의 주전 선수들은 4월 팀의 반짝 상승세를 이끌기도 했으나, 이내 추락하며 성적도 미래도 보장되지 않는 리빌딩 무용론이 팬들 사이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7월 들어 일부 관중은 경기장에 당시 양상문 감독의 퇴진을 기원하는 현수막을 내걸었고, 최악의 분위기 속에 팀 승률은 4할을 힘겹게 넘기는 데 그치며 순위도 8위까지 처졌다.
하지만 총체적 난국과도 같은 상황을 겪던 LG는 8월이 되자마자 예상치 못한 대반전을 써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원동력은 구단의 전폭적인 리빌딩 정책하에 기회를 잡은 신예들한테서 나왔다. 지금은 어엿한 중고참으로 자리 잡은 양석환(현 두산), 유강남, 이천웅, 채은성 등이 그 주인공이다. 8월 3일부터 12일까지 연속된 9연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젊은 선수들은 분위기를 타며 신바람 야구의 새 장을 열었다. 해당 기간에 순위도 두 계단 올라서며 다시금 5강 싸움에 합류할 기틀을 마련했다.
이전까지의 성적이 워낙 좋지 않았던 터라, 파죽지세에도 곧바로 상위권에 진입하진 못했다. 하지만 이미 탄력을 받은 젊은 팀은 9, 10월에도 기세를 올리며 정규시즌 막바지에 팀을 4위까지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4할도 간당간당했던 승률은 정확히 5할에 맞춰졌고, 준플레이오프전에선 3위 넥센을 물리치며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패기로 반전 드라마를 써내며 세대교체와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또 리빌딩에 대한 통념을 통쾌하게 뒤집은 연도였다.
#이어질 가을 드라마, 주연은 누구?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10월 말이면 모든 잔여 경기 일정이 마무리되고 쉴 새 없이 포스트시즌이 시작된다. 이미 너무나도 치열한 순위 경쟁을 거치며 흥미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11월 새로운 가을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또 느낌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팀의 어떤 선수가 가장 유력한 주연 배우가 될까?
우선 가장 유력한 한국시리즈 직행 팀인 KT 위즈의 고영표가 있다. 올해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이자 KT 창단 때부터 산전수전을 겪어온 그가 팀의 첫 우승을 이끈다면 그것만큼 감동적인 장면은 없을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 박해민이 멋진 활약으로 팀의 기나긴 암흑기를 완전히 끊어내는 그림도 그려진다. 9월 중순에 당한 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팀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만큼 삼성 팬들은 캡틴 박의 활약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
이미 반전을 써 내려오고 있는 베어스로 눈을 돌리면 김인태도 떠오른다. 주연도 해 본 사람이 더 잘하지 않겠는가. 2019년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결정적인 동점타를 쳐낸 경력이 있고, 최근 10월 6일 한화 이글스전에 대타로 나와 역전 스리 런을 때린 클러치 능력을 높이 사 추천한다. 곰 군단에 이목이 쏠린 사이 2017년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거인 군단의 약진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어수선했던 전반기를 뒤로하고 후반기 들어 착실히 승수를 쌓고 있는 그들에게도 가능성은 남아 있다. 만일 롯데가 극적으로 와일드카드 결정전 티켓을 거머쥔다면, 올해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서 굳건히 에이스 역할을 맡는 박세웅이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 더그아웃 매거진 127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1년 127호(11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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